STAR365

가수 나미 " 호소력 짙은 허스키 보이스로 부르는 슬픈 인연"

작성자 정보

  • PEOPLE365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가수 나미"  


호소력 짙은 허스키 보이스로 부르는  슬픈 인연


80년대를 주름잡던 탑 가수, 오로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노래’ 밖에 없었던 그녀가 어느 날 ‘여자’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을 잠시 비웠다. 긴 기다림의 시간, 다시 새로운 가수들이 탄생하고 세상은 변해가지만 한순간도 노래를 잊어본 적이 없는 그녀는 언제나 무대를 꿈꿨다. 이제는 가수 ‘최정철의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아들의 성공을 기원하는 보통 어머니의 삶을 살아가지만, 시간이 준 잔주름보다도 아름다운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신비스럽기만 하다.

글 이지영 기자  사진 최재희 기자  사진제공 들림엔터테인먼트

 

가수나미사진.jpg

 

당대의 대가수 조용필과 나미

다양한 가요 프로그램들을 통해 스타가 탄생하고, 또 히트곡이 탄생한다. 그 중 1980~90년대 가요계의 지표 역할을 했던 프로그램 KBS 의 <가요톱10>은 모든 가수의 로망 그 자체였다. 

5주 연속 1위의 영애를 안기 위해 수많은 가수가 방송 활동과 홍보 활동을 했고 톱10(상위 10위 순위)에 들어가는 가수는 명실공히 인기가수라 불렀다.

가수 나미도 〈빙글빙글〉로 5주 연속 1위를 기록하는 등 가요톱10과의 추억이 많다. 1979년도 〈미운 정 고운 정〉으로 시작해서 〈영원한 친구〉, 〈빙글빙글〉, 〈슬픈 인연〉, 〈인디언 인형처럼〉등을 히트시키며 당대 최고의 인기 여가수로 떠오른 나미. 특히 <빙글빙글>은 여러 매체에서 1985년 상반기 한국 최고의 히트곡, 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 노래 1위로 선정될 만큼 나미의 진가를 알린 곡이다. 여자가수로 나미가 당대를 주름잡았다면 남자는 조용필이 있었다. 가왕 조용필의 전성기였던 이 시기에 가수 나미와 조용필의 1, 2위 쟁탈전이 여러 번 펼쳐졌다. 

“제 기억으로 마지막 대결이 〈인디언 인형처럼〉과 조용필 선배의 〈추억속의 재회〉였어요. 

항상 1, 2위를 다투다 그때는 제가 1위를 했던 기억이나요 .” (웃음)


떡잎부터 남달랐던 한류 신동

나미는 평생을 음악만을 해왔다. 6.25 직후 동두천에서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음악을 듣고 부르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특히 팝송을 잘 부르곤 했는데 동두천에서 ‘명옥(나미의 본명)’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녀는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일찌감치 미8군에서 공연을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마이클 잭슨이랑 데뷔시기가 비슷해요. 마이클 잭슨의 노래도 많이 듣고 불렀어요. 최정철이 한테도 그 음악을 많이 들려 줬구

요 .”  부모님은 재능 있는 딸을 재대로 키워내기 위해 애를 많이 쓰셨다. 가요계와 관련된 단체나 회사들을 찾아다니며 딸의 미래를 함께 준비했다. 


나미씨 사진.jpg

 

이후 여성 5인조 브라스밴드 ‘해피돌스’로 활동하면서 미국으로 진출했고 열네 살이던 1971년에 

는 전쟁 중이던 월남에서 포탄이 떨어지는 것을 감수해가며 위문 공연을 하기도 했다. 

“‘해피돌스’의 메인싱어였어요. 밴드이기 때문에 악기를 다뤘어요. 소프라노 섹소폰과 기타는 저도 연주할 줄 알았기 때문에 사운드 받쳐주는 신디사이저만 있으면 나머지는 다 해결됐죠. 또 발음이 좋다고 해서 쇼 MC를 보기도 했어요.”  ‘해피돌스’는 유명한 호텔 나이트클럽, 또 흑인 클럽 등에서 인기가 많았다. 당시는 흑인들에게서 호응을 받고 인정을 받아야 진짜 음악성을 가진 가수라는 수식어를 달 수 있었다. 캐나다에서도 공연활동을 했고 마이클 잭슨 공연을 직접 보기도 했다. 이 모든 경험이 훗날 한국에서 인정받는 대가수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전 세계가 탐내던 목소리

허스키하면서도 호소력 짙은 독특한 목소리. 가수 나미를 상징하는 언어다. 그녀는 목소리만으로도 여러 나라의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 호텔 공연 중에 이탈리아의 유명한 밴드를 이끌고 있었던 뮤지션인 ‘프랑코 로마노’를 만났다. 나미의 감정 표현력을 높게 산 그는 1979년 ‘나미와 머슴아들’이라는 음반을 함께 만들게 되고 B면 수록곡인 ‘영원한 친구’는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일본에서는 목소리와 프로필만을 보고 나미를 찾아오기도 했다. 현대 레코드에서 기획한 한일 합작 프로젝트로 일본인 작곡가인 우자키 류도(宇崎竜童)가 작곡한 곡을 양국에서 동시에 발매하는 기획이었다. 그렇게 해서 가수 하시 유키오(橋幸夫)가 일본어로 먼저 발표하고 한국에서는 나미가 불러 히트가 된 곡이 바로 〈슬픈 인연〉이다. “연습할 당시 첫 아이를 임신 중이었어요.

 

가수 나미사진.jpg

 

국에서 아이를 낳자마자 일본으로 가서 녹음을 했죠. 〈슬픈 인연〉 녹음을 마치고 방송 활동, 콘

서트 활동을 하던 시기였는데 갑자기 한국에서 〈빙글빙글〉이 떴으니 빨리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하더라고요. 정철이를 낳고 〈빙글빙글〉이 히트가 된 거니까 아들 덕에 인기가수가 된 셈이에요. 

복덩이였던 거죠.”  당시를 마치 ‘조용필의 시대’ 같았다고 회상하는 나미에게는 〈촛불〉이라는 노래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영원한 친구〉를 한참 홍보할 당시였어요. 어느날 방송국에 가는데 라디오에서 〈촛불〉이 나왔어요. 가슴에 와 닿고 사운드가 너무 좋아서 누구냐고 물어보니 조용필 씨 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촛불〉이 노래가 좋아서 정철이에게도〈촛불〉을 꼭 들어보라고 권유했었죠.”  실제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가수 조용필과 사석에서 만나 〈촛불〉 1절을 조용필이 부르고, 2절을 최정철이 불러서 원곡자 조용필로부터 호평을 받은 적도 있단다. 

MBN의 〈보이스킹〉에서 가수 최정철을 각인시킨 노래가 되기도 했으니, 어머니인 그녀의 음악적 조언이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확실하다. 

가수 나미는 아직도 잠을 자면서 음악을 틀어놓는다. 여자로서 엄마로서만 살아온 세월이 긴 만큼 가슴 저 깊은 곳에는 항상 음악에 대한 갈망이 있는 듯 보였다. 미국에서 활동 제의도 받았지만 한 달에 한 번꼴로 있는 제사 상차림을 준비해야 하는 것 때문에 포기한 그다. 가정에서 최선을 다했던 그는 노래도 힘들지만, 가정에서의 역할도 노래만큼 힘든 것이라고 말한다. 


DSC09271-Recovered.jpg

 

여전히 매력적인,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

세월이 열정을 가라앉힐 즈음, 그녀는 가수로서 목소리를 제대로 남겨놓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다시한번 도전을 감행했다. 2013년도에 일렉트로닉의 중독성이 강한 〈보여(Voyeu r)〉라는 곡을 발매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음악을 더 잘하고 싶다는 그는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동료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70세가 되어도 노래하는 분들이 참 부러워요.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변해도 대중들에게 계속 가슴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이 가수고 그것이 노래잖아요. 저는 평생 노래만을 할줄 알았거든요. 이렇게 전업주부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저에겐 보물 같은 두 아들이 있어서 행복

하죠 .”  

타고난 끼와 무대 매너로 당시 대중가요의 한 축이 되었던 가수 나미는 완벽주의자로 불릴 정도로 피나는 연습을 했던 노력파였다. 천재가 노력했을 때 기적이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가수가 만들어 낸 열정의 결과물은 독창적인 창법과 음악으로 재탄생한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나미의 노래를 듣고 싶어 하는 팬들이 적지 않다. 특히 〈슬픈 인연〉은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를 했지만 원곡을 뛰어넘지 못하는 곡 중 하나로 손꼽힌다. 깊은 감성전달로 많은 사람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는 가수 나미는 여전히 아름답고 여전히 순수한 ‘소녀’ 같은 그 시간에 머물고 있다.

 

@PEOPLE365 & people365.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자료

PEOPLE365 TV


이세온의 가요산책


코렌코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