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온의 가요산책

이난영과 ‘목포의 눈물목포의 눈물로 조선의 눈물 닦아준 불멸의 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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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온의 가요 100년史 이난영과 ‘목포의 눈물

 

목포의 눈물로 조선의 눈물 닦아준

불멸의 디바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깊은 슬픔을 간직한 검푸른 바다가 가슴으로 젖어 들어오면 누구나 한 번쯤은 불러 봤을 법한 노랫가락 한 구절이 입가에 맴돌게 됩니다. 이 노래 목포의 눈물은 당시 나라 잃은 백성들의 서러움을 달래주던 조선의 눈물이었습니다. 시대와 아픔을 같이했던 한 여가수의 녹록지 않던 삶! 

그 한 많던 시절 재능을 가진 여가수가 고통의 열매로 결실을 맺은 예술혼은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 우리에게도 숙연한 가슴 아림을 줍니다. 한평생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 여성으로서 어머니로

서 또 문화예술인으로서 살아온 한 예술인의 삶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글 가수 이세온  사진제공 목포시청 공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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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에 막간 가수로 무대 데뷔

<목포의 눈물> 1930년대 10만 장 판매

<목포의 눈물>은 목포 양동 출신의 이난영이란 가수를 민족 가수로 성장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1934년 발매 시점부터 1940년까지 6년간의 음반판매를 조사해본 결과 10만 장이라는 판매량을 기록하고 일본과 중국에서 초청공연을 다닐 정도로 인기를 구가했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가수 ‘미찌야꼬’의 음반 판매량이 9만 장인 것과 비교해보면 대단한 판매량임을 알수 있습니다. 또 우리 가요사 최초로 일본으로 취입되어 현지에서도 폭발적인 반응을 얻기도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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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디바로 불리는 이난영! 그녀에게는 한이 서린 노래를 불러내기에 충분한 파란만장한 인생사가 있었습니다. 예술가의 필수 조건이라고 하는 ‘고통’의 무게가 이난영에게도 그리 가볍지만은 않았지요. 1916년에 태어나 이옥례(호적 이름 이옥순)라는 본명을 가진 이난영은 부두 노동자이시던 아버지와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시던 어머니 밑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가난했던 이난영은 간신히 다니던 보통학교를 미처 마치지 못하고 어머니와 함께 제주도로 남의집살이를 하러 가게 됩니다. 일본인 극장주의 집에서 어머니는 식모살이하고 어린 난영은 집주인의 아이를 돌보거나 마루 닦는 것을 거들면서 틈틈이 축음기에서 들리는 노래를 따라 부르곤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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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가을 무렵 일본의 극단 토월회(土月會)의 후신인‘태양극장’에 가입해 막간 가수로 무대에 서기 시작합니다. ‘이난영’이라는 예명도 그곳에서 얻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관객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난영은 정식 멤버가 됐죠. 1933년 5월 태양극장이 일본 순회공연을 하게 되어 일본으로 건너갈 때 단원으로 동행하게 됩니다. 태양극장은 일본에서 공연하는 동시에 태평(太平)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극 음반을 녹음했는데, 그때 이난영도 병중에 있던 아버지에게 약값을 보내기 위해 <시드는 청춘>, <지나간 옛꿈> 노래 두 곡을 녹음했습니다. 하지만 녹음한 음반은 9월에 발매되었으나, 아버지는 그 직전 8월에 사망하고 말았고 이 일은 후에 ‘아버지는 어데로’라는 아버지에게 바치는 노래를 부르는 계기가 됩니다.

그 무렵 오케(Okeh)레코드와 연락이 되어 전속 가수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난영의 나이 17세에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던 시간이었습니다. 오케레코드에서의 첫 데뷔곡인  <향수>(김능인 작사, 염석정 작곡) 이후 <불사조(不死鳥)>(김능인 작사, 문호월 작곡), <고적(孤寂)>(김능인 작사, 문호월  작곡)  등을 필두로 <지나간 옛꿈>(김파영 작사, 김기방 작곡) 등을 잇달아 발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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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대 1의 경쟁을 뚫은 청년 시인의 가사에

손목인 선생이 곡을 붙여

그 노래 중 <불사조>는 춘향전의 내용 중 옥중에 갇혀 고생하는 춘향이의 애달픈 심정을 나타낸 가슴 시린 노래였습니다. 야리야리한 비음 창법으로 가슴을 파고 드는 노래는 켜켜이 쌓여있던 슬픔과 한을 녹여 냈습니다. 이난영의 두 번째 히트곡으로는 <봄맞이>(윤석중 작사, 문호월 작곡)를 꼽을 수 있습니다. 모진 겨울이 물러나는 이른 봄, 특유의 구성진 가락을 듣노라면 엄혹한 시절 냉가슴을 앓았던 마음이 따뜻하게 녹아내리기도 했습니다. 

이후 이난영은 오케레코드를 대표하는 여가수로 성장했고, 드디어 1935년, 그녀의 나이 19세 되던 해 이난영의 생애에서 최고의 해가 찾아왔습니다. 한국가요사에서 불후의 명작으로 일컬어지는 <목포의 눈물>(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이 오케레코드사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목포의 눈물은 오케레코드사에서 조선일보와 더불어 제1회 향토 노래 현상모집 기획으로 가사를 공모했었는데, 여기에 목포에 거주하고 있던 청년 시인 문일석이 3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1등을 한 가사에 작곡가 손목인 선생이 곡을 붙여 만들어지게 된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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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눈물>의 첫 제목은 ‘목포의 사랑’이였습니다. 

오케레코드의 이철 사장은 울산 출생으로 이미 ‘타향살이’ 등을 히트시켰던 가수 고복수가 목포의 눈물을 부르도록 낙점해두었으나 지역의 정서를 가장 잘 체득하고 있는 가수에게 그 노래를 부르도록 해야 최고의 가창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작곡가 손목인의 이의 제기로 이난영이 목포의 눈물을 취입할 수 있었습니다. 

손목인 선생은 이난영을 회상할 때 ‘마음이 착하고 얼굴이 곱고 마음이 명량하다’ 고 떠올립니다. 또 노래를 너무 잘하고 서너 번 노래를 가르쳐주면 자신을 뺨칠 정도로 노래를 잘해서 기가 막힐 정도라고 언급했습니다.

조선이라는 이름으로는 무엇하나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도 누릴 수도 없이 살얼음판을 거닐어야 했던 그 어둡던 시절 조선 총독부는 <목포의 눈물>의 가사 중에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란 가사를 트집 잡아 목포의 눈물 판매를 금지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종로 경찰서에 불려갔던 작사가 고 문일석 선생이 ‘삼백 년이라는 연못에서 사랑을 품은 원앙새 암컷 수컷이 따로 정을 토하느라 품어 안은 것’이라고 비유하는 기지를 발휘해서 간신히 일제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부터 300년,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노적봉을 군량미로 속여 왜구를 물리친 역사를 알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는 너나 할 것 없이 300년 묵은 원한을 달래기에 충분한 민족의 노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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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딸과 조카로 구성된 최초의 걸그룹 ‘김시스터즈’ 탄생시켜

스무 살 여가수는 1936년 불세출의 천재작곡가 김해송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결혼도 하기 전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이철 사장은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도록 주선해줍니다. 12월 24일 경성의 유명했던 요릿집에서 이기세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립니다. 슬하에 7남매를 두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던 이난영은 6.25 전쟁 이후 남편 김해송 씨의 납북으로 인해 또다시 고생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김해송이 납북을 당한 뒤 이난영은 남편과 함께 운영하던 K.P.K.악극단을 ‘이난영악단’으로 바꾸고 계속 꾸려나 가지만 한 해를 채 넘기지 못하고 파산에 이르게 됩니다. 이 시기에는 당대의 내로라하는 가수 남인수와의 사랑이 시작됩니다.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여성 가장으로서 이난영은 자신의 행복보다는 자녀들의 꿈과 희망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쏟게 됩니다. 음악에 재능을 타고난 두 딸(김숙자 김애자)과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의 딸을 그룹으로 구성해 `김시스터즈`를 발족시킨 것입니다. 이들은 어머니 이난영의 엄격한 교육으로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노래와 함께 춤까지 췄으며, 미8군 무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시에는 여성 그룹들이 많이 만들어지는 시기라 그들과의 확실한 차별성은 실력밖에 없다고 판단한 난영은 하루에 5시간이 넘는 연습을 시켰고 동, 서양악기를 망라해서 개인당 13가지가 넘는 악기를 상당한 수준까지 연주할 수 있도록 조련사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1959년 ‘김시스터즈’는 아시아 걸그룹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에 진출했습니다. 원더걸스 등의 걸그룹들이 오늘날 미국에서 성과를 거두게 된 그 밑바탕에는 김시스터즈의 피나는 노력과 어머니 이난영의 헌신적인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해석은 이미 여러 논문을 통해서도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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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영은 딸들의 진출에 이어 아버지를 빼닮아서 악기연주와 가창에 능한 세 아들도 김 보이스로 발족시켜 모두 미국으로 진출시켰습니다. 김시스터즈의 회고 영상을 보면 어려운 시절 ‘목포의 눈물’을 부르고 주먹밥 몇 개를 얻어서 자식들을 먹이곤 했다고 합니다. 이난영은 음악인으로서 어머니로서 자녀들을 보살피기 위해 피눈물 나는 고통을 감수하고 포기하지 않는 도전정신으로 자녀들을 성공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힘든 현실 속에서도 자기 자신의 행복보다는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시키고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친 이난영의 삶은 그 한 많던 시절 우리네 어머니들이 살아오신 희생의 모성애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마흔아홉의 나이에 세상과 작별, 

유달산 자락에 ‘이난영 노래비’ 세워져

김시스터즈는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며 활동의 터전을 마련하고 음반을 녹음하며 1967년 50만 달러를 세금으로 내 라스베이거스에서 유명한 고액 납세자의 부류에 속할 만큼 인기를 얻었습니다. 자녀들은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홀로 남은 이난영은 늘 고독했습니다. 1957년 선배 가수 고복수의 고별공연을 서울 시공관에서 개최하게 되었을 때 이난영은 자신의 대표곡 <목포의 눈물>을 불렀습니다. 한과 슬픔과 서러움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울음 절반, 흐느낌 절반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고복수가 함께 이난영 옆으로 와서 합창으로 도와주어 겨우 노래를 마칠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목포의 눈물>을 아마도 수천 번 이상 무대에서 불렀지만, 방송국에도 남아있는 이 날의 노래야말로 그간의 한없는 고통과 서러움이 응축된 최고의 공연이었을 것입니다.

자녀들을 보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이난영은 1년 동안 뒷바라지를 해주며, 1960년대 미국의 유명한 대중음악 무대인 설리번 쇼에 김시스터즈와 함께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귀국 후 사랑하던 남인수도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혼자서 우울증으로 고생을 하던 이난영은 1965년, 결국 49세의 나이로 빈방 안에서 혼자 쓸쓸하게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한 많은 인생을 살다간 비운의 여가수 이난영,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긴 했지만, 장례식에는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고 1969년, 이난영이 세상을 떠난 4년 뒤 유달산 자락에는 이난영 노래비가 세워졌습니다. 역경의 세월 속에서 ‘목포의 눈물’로 대표되는 이난영의 노래는 당시 조선의 눈물이자 가슴 저 밑에서 울려오는 희망가 그 자체였습니다.  

국민들의 마음을 한데 모아 서러움을 나누고 아픔을 함께함으로 진정으로 우리가 하나라는 것을 알게 해준 그 목소리, 가수 이난영, 혹자는 기생충, BTS 등 문화예술 분야를 시작으로 K-방역까지, 지금의 대한민국이 국운 상승기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우리 문화예술의 저변에는 이난영과 같은 도전정신과 희생정신을 가진 예술인들이 선견지명을 가지고 끝없이 자신과 싸워온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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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의 국민 정서를 대변해 주던 예술가 이난영! 시대가 주는 고통과 서러움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한 어머니의 삶, 그 녹록지 않은 삶을 되돌아보며 치열하고 진정성 있는 예술인이 던지는 예술정신은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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