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온의 가요산책

가수 이세온의 가요산책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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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온의 가요 산책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슬픔을 승화시킨 피난시절 희망 찾기 

 

어느 실향민은 이 노래를 들으면서 말했다.

눈보라가 휘날리던 그 겨울, 차마 죽지 못해 떠나온 고향을 멀리하고 빅토리아호에 몸을 싣고 떠나가는 빈손은 놓쳐버린 부모형제를 찾는 아타까운 허우적거림으로 싸늘해진 가슴을 달랩니다.”

그저 아무 일 없이 밥상머리 마주하는 것이 그렇게도 힘들었던 그 시절, 구슬프지만 힘찬 노랫가락으로 우리네 쓰린 가슴을 토닥여주고 희망을 갖게 해주었던 그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 70년이 훨씬 넘은 분단된 조국의 아픔을 삭여주는 이 노래를 올해도 내년에도 10년 후에도 부를 사람들은 바로 우리 한국인이다.

세온 가수, 사진 부산시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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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속에 피어난 희망과 도전의 노래 

100만 명에 가까운 민간인 학살, 135천명의 남한군 전사, 38만의 북한군 전사, 2천만명의 이산가족. 6.25가 만들어낸 민족상잔의 뼈아픈 역사입니다.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미래를 설계하면서, 과거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지만 6.25전쟁을 그렇게 이상적으로만 되돌아보기에 우리는 너무나 많은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가족이었던 그들이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열강들의 나눠먹기에 의해서 죽고 죽이기를 반복했습니다. 이념을 무기로 삼아 광기어린 인권유린을 하기 까지 대한민국은 스스로를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 넣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뼈아픈 시절 잠시나마 국민들을 위로하고 다시금 희망과 도전이라는 글자를 생각나게끔 해준 것은 바로 노래였습니다.

피난민의 집결지 부산

6.25전쟁의 아픔을 노래한 대중가요 중에 부산을 소재로 삼은 노래가 유독 많은 것은 부산이 비극의 아픔을 공유하는 상징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부산 동광동 피난민촌에 위치한 <40계단>은 구호물자를 내다 팔던 장터이자 판자촌 언덕길로 이어지던 삶의 길목이었고 피란민들의 고단함과 고향을 잃은 설움을 대변해 주던 역사적인 장소였습니다.

그 곳은 한국전쟁 당시의 애환을 담고 있는 풍경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아코디언을 켜고 있는 조각상, 튀밥 튀기는 노인, 물지게를 진 소녀의 재현 작품들은 그 시절 그 곳에서 기쁨과 슬픔을 나누었을 피란민들의 삶을 보여줍니다.

<40계단>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부산의 명물 국제시장과 영도다리가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지금도 영도다리 계단 아래 해변가에는 피란민들의 흔적을 간접 경험시켜주는 그 시절의 낡은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피란민들은 헤어지게 될 때 무작정 부산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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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위로의 노래가 탄생하게 되니 바로 그 노래가 굳세어라 금순아입니다. 

전쟁의 아픔과 한을 노래로 전하며 우리 국민에게 어려웠던 그 시절 다시금 희망이라는 두 글자를 가슴에 품게해 준 그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 영도다리를 건너면 가수 현인 선생의 전신 동상과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비가 세워져 있어 영도다리를 오가는 이들에게 깊은 감회와 위로를 건네주고 있습니다. 

국민을 위로했던 명곡의 탄생  

가수 현인 선생의 〈굳세어라 금순아〉는 휴전 무렵인 1953년 분단으로 헤어진 사람들이 국제 시장 등에서 장사치로 일하면서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금순이’를 생각하며 다시 만나게 될 때 까지 굳세게 잘 지내라는 내용의 노래입니다.  

한국전쟁 중 대구 오리엔트 레코드 문예부장으로 있던 작곡가 박시춘이 작곡하고 그의 친구 이자 여순사건에 연루되어 오랜 기간 도피 생활을 한 인물로 알려진 작사가 강사랑이 피난민의 고단한 삶을 경험하고 이 노래의 가사를 완성했습니다. 피난민들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는 생생한 가사에 감명을 받은 박시춘은 곧바로 작곡에 들어가 오리엔트레코드사 2층의 다방에서 자정이 넘은 시간 군용 담요를 창문에 겹겹이 가리고 어렵게 녹음을 마쳤다고 합니다. 

1절은 흥남부두에서 피난 오면서 금순과 이별하게 된 과정을 표현합니다. 2절은 부산 국제시장 에서 장사하며 지내는 화자가 영도다리에서 헤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3 절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남북통일’이 되면 재회하여 함께 춤을 추자는 매우 희망적인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이 노래는 애절한 가사와는 달리 경쾌한 멜로디를 빌려 마치 슬픔도 흥겨움의 하나처럼 느끼게 해줌으로 슬픔을 극복시키는 놀라운 정서적 치유를 경험하게 해줍니다. 통일되면 헤어진 가족들을 다시 만나 함께 춤을 추자는 희망적인 메시지는 곧 현실화될 것 같은 기대하게 합니다. 

피난민들의 아픔을 노래한 가수 현인  

영도 영선동 출신 가수 현인 선생은 1919년 2월 14일 영도에 있는 스탠더드 석유회사에 다녔던 아버지 현명근과 일신여학교를 나온 신여성이었던 어머니 오봉식 사이의 2남 1녀 중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 회사의 사원 주택이 있던 영도와 할머니 댁이 있던 동래군 구포면을 오가며 성장했습니다. 

이후 석유회사에 다니던 아버지가 일본 <마이 니치신문>의 도쿄지사 기자가 되어 일본으로 떠나자, 5살 때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러시아의 베이스 가수 표도르 샬랴핀(Fyodor Ivanovich Chaliapin)의 독창회를 보고 처음으로 음악에 깊이 매료되었다고 합니다.  

구포 보통공립학교에 입학, 3학년 때 영주소학교로 전학한 뒤 다시 5학년 때 부친과 함께 상경하여 1931년에 경성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학창시절의 현인선생은 학교의 배구 대표 선수였을 만큼 운동도 잘 했고, 영어와 일본어는 물론이고 음악은 더욱 뛰어 났습니다. 

밴드부에서 일본의 대중가요나 미국의 포크송을 트럼펫으로 즐겨 불렀을 정도로 소질이 있었습니다. 1935년 음악에 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동경음악학교(현 동경예술대학) 성악과에 입학하여 음악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일본 유일의 관립학교인 동경음악학교는 조선의 음악 엘리트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음악을 선택한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긴 아버지 때문에 막노동으로 학비를 벌어야 했습니다. 

1년 뒤 대학재학 중이던 현인은 NHK 합창단의 모집 광고 오디션에 응시하여 단원이 되었습니다. 

1942년에는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성보악극단의 음악 교사로 일하다가 1943년 박단마·황해·진방일 등과 악극단을 구성해 중국 톈진으로 가서 클럽 ‘신태양’의 무대에 올랐으며, 베이징·항저우· 상하이 등지로 일본군을 위한 위문 공연을 다녔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패전한 뒤에 일본인을 위해 노래했다는 이유로 베이징 비밀 교도소에 6개월 수감 되어 고초를 겪고 서울로 돌아왔지만, 가족들로부터도 철저히 외면당하게 됩니다. 홀로서기를 시작한 현인은 벌이가 좋은 미군 위문 공연에 뛰어들어 탱고를 전문으로 하는 고향 경음악단을 조직하였습니다.  

가수 현인이 처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때는 1947 년 최초의 나이트클럽인 ‘뉴스맨스 클럽’에서 ‘서울 야곡’을 불러 밤무대의 황제가 됐을 때입니다. 

특히 같은 해 공전의 히트곡 ‘신라의 달밤’을 녹음하면서부터 성공 가도를 달렸습니다. 이런 인기 덕에 1949년 해방 후 최초의 음악 영화인 <푸른 언덕>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되고, 영화 주제가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1952년에는 에디트 피아프와 이브몽탕(Yves Montand)의 히트곡

 <장밋빛 인생> 등을 불러 한국에 샹송 붐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시원하게 내지르는 창법과 떠는 듯한 독특한 바이브레이션, 스타카토 창법으로 1950년대 가장 빛나는 대중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고국을 그리워하며 지낸 가수 현인의 이민 생활  

이런저런 활동을 하던 60년대를 지나 1973년, 현인은 뉴욕으로 이민을 떠나 그곳에서 미스코리아 진 출신 김미정 여사와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됩니다. LA에 있는 ‘대호’라는 나이트클럽에서 노래했었는데 김 여사가 구경하러 갔다가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당시 피아노에 기대어 노래하는 모습이 의아해서 알고 보니 6·25 이후 위문 공연 중에 차 사고로 허리를 다쳐서 그렇게 된 것을 알고 김 여사는 한의사를 소개하게 되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정이 들어서 결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코리아나 하우스’라는 식당을 함께 운영하기도 했고 ‘가스등’이라는 피아노바를 운영하기도 했는데 고국을 그리워하던 현인은 1981년 먼저 귀국하고 김 여사 역시 나중에 귀국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988년부터 2000년 봄까지 악극 ‘그때 그쇼를 아십니까?’의 무대를 끝으로 2002년 4월 13일 지병인 당뇨 합병증으로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국을 사랑하던 가수, 특히 고향 부산을 너무나 그리워해서 부산 모래사장에서 흘러간 노래들을 부산시민들과 함께 마음껏 목 놓아 부르는 것이 꿈이라고 이야기하던 애향 가수 현인의 노래는 고단했던 한국 현대사를 반영하고, 우울한 시대에 우리 서민들의 아픔을 달래 주었습니다. 

시대의 아픔과 절망을 희망으로 연결하는 고리 역할  

일반적으로 대중가요는 개인의 구체적인 체험을 노래하지만, 그 노래가 불릴 당시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한국전쟁 직후 그 한 많고 어려웠던 시절, 시대의 아픔과 절망을 희망으로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했고 지금도 회자되어 동명의 영화가 두 차례 제작되었고 드라마로도 만들어졌습니다. 또 코미디 패러디의 영원한 소재임은 물론이고 이미자, 나훈아, 황금심, 은방울 자매, 박일남, 김연자, 송해, 김희갑, 이박사 등 수십 명의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되기도 하였습니다.  

굳세어라 금순아의 ‘금순이’는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고 억척스럽게 모진 삶을 일구어 나가야 했던 대한민국의 모든 여성을 아우르는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사회적 소용돌이 속에서 무력할 수 밖에 없었던 서민 대중들의 고통을 신파적인 트롯 양식으로 담아내어 우리 민족의 삶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고통을 달래 주고 위안을 주었던 희망의 노래 그 자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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