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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백범 김구 "위대한 민족혼! 이 땅의 등불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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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지혜를 말하다: 백범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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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민족혼! 이 땅의 등불 되다


BTS, 영화 기생충, K-방역. 요즘 대한민국을 설명하는 수식어들이다. 이외에도 K-컬쳐라는 이름으로 이미 전 세계적인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내고 있는 한국문화의 결정체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백범 선생이 일찍이 통찰 하던 높은 문화의 힘에 대한 갈망이 7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서서히 그 진가를 발휘하는 듯하다.

독립을 넘어 국가 존립의 기반을 높은 문화창달에 두었던 시대의 선각자였던 백범 김구선생. ‘코로나19’라는 엄혹한 시대적 재앙을 맞닥뜨린 오늘, 희망의 공식이 되어주는 그의 가르침을 통해 희망을 불러오는 절대긍정의 원천을 찾아보고자 한다.

글 이지영기자, 사진 손철희 기자

 

위대한 민족혼의 탄생

고난의 시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속과 통합을 이끌며 반일저항의 상징으로 임시정부의 국제적 위상을 높힌 강한 정치력을 지닌 정치지도자였던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

그는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호는 백범(白凡)이다. 아명은 창암(昌岩), 본명은 창수(昌洙)였으나 구()로 개명하여서 총 4가지 뜻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15세 때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가 되고 1894년에는 팔봉도소접주(八峯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한 후 김이언의 의병단에 가입한다. 이듬해 귀국하여 안악으로 돌아가던 길에 치하포에 머무르다가 일본인 쓰치다가 조선인으로 변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죽이고 그의 시체를 강에 버렸다.


당시 을미사변으로 인해 우리민족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이 사건은 선생이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단행한 첫 번째 조치였다. 선생은 이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고종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기도 했다.


선생은 종교적 활동에 있어서도 상당히 폭이 넓었다. 그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민족적 요구에 부응한 선택이었다. 동학의 소접주였지만 1898년 공주 마곡사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하여 1903년에는 기독교에 입교하기도 했다. 후에 천도교에 깊이 관여하게 되고 이는 후에 3.1운동의 정신적, 조직적 밑거름이 되었다.

 

항일운동의 지휘관이 되다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을 역임한다. 지금의 경찰의 효시를 김구선생으로 보는 관점도 이때 선생의 활약에 근거한다. 본격적인 항일무력활동을 시작하고,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19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 저격사건, 상하이 훙커우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을 주도했던 이봉창·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휘했다. 1933년에는 난징에서 장제스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를 건의하여 한인청년들을 장교로 육성하는 길을 열었고 대일본전투방책을 협의하여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독립운동이라는 민족적 결집의 구심점의 역할을 해오던 선생은 1940년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조직인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한국독립당의 집행위원장, 광복군 통수권자,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의 주석이 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굳건히 지키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활약한다.

1941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고, 김원봉과 함께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총사령부 설치와 함께 그 사령관에 지청천을 임명했다. 그해 129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하기도 했다.

 

1945년 일본의 항복이 있기 전에 선생은 이미 독자적인 독립을 위해 광복군을 훈련시켜 참전을 하여 직접 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결국 생각보다 이른 일본의 항복으로 조국의 독립을 맞이하였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완전한 독립을 위한 발걸음 


그는 말했다. 

“8.15해방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간 애 써 참전을 준비한 것도 허사가 되고 말았다. 앞으로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고. 8·15광복 이후 백범 선생의 걱정대로 한반도는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반토막이 나게 된다.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고 선생은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한다. 대한독립촉성중 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 부총재 등을 역임하며 이승만과 함께 우익 진영을 대표했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주장한다. 그 후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했다. 정부수립에 참가 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던 그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가 쏜 흉탄에 서거하였다. 만일 1948년 제헌국회의 총선거에 백범선생이 참여했더라면 1949년의 그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백범선생이 살아있다면 대한민국은 지금 어떻게 변해있을까? 어쩌 면 6.25를 겪지 않아도 되었던 통일된 조국의 모습에 가깝지 않았을까.


INTERVIEW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정양모회장 


청년이 진취적이고 발랄할 때 나라가 흥합니다 


선친과의 인연으로 초등학생 때 백범 선생을 마주한 일이 있있던 정양모 회장. 그는 백범 김구 선생을 큰 태산 같았다고 기억한 다.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에서 백범김구기념관의 관장으로 또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으로 취임하기까지 지난 20여 년 의 세월을 ‘백범’이라는 큰 인물을 현 시대에 재현시키는데 쏟았다. 백범정신의 위엄을 몸소 느끼시고 실천하는 그의 말속에는 이미 혼연일치가 된 백범의 혼이 살아있었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는 언제 설립되었고, 무슨 일을 하는지요. 


백범 김구 선생이 1949년 6월에 돌아가시고 우리 기념사 업협회는 2달 뒤인 1949년 8월에 설립되어 올해가 설립 71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협회에서는 백범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받들고 선생을 기리기 위해 다양한 선양사업과 추모사업, 교육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2005년부터 전국의 청소년과 군부대 등 젊은 세대들에게 《백범일지》를 읽히고 시상을 하는 대회를 개최하는 데 이 대회에 총 60여만 명이 참가했지요. 


1949년 설립 이후 가장 뜻깊었던 일은 어떤 일이신 지요. 


백범 선생 서거 20주년이 되는 1969년 8월 남산에 백범 김구 선생 동상을 세우고 그 일대를 ‘백범 광장’으로 이 름 지었던 일과, 2002년 10월 22일 이곳 효창동 선생 묘소 인근에 백범김구기념관을 건립했던 것을 꼽을 수 있 을 것 같습니다. 우리 기념관은 개관 이래 작년 2019년 까지의 전시관 총 관람 인원이 약 2백4만 명입니다. 개인 전시관으로는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하고 있고요. 가장 많은 전시품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백범 김구라는 역사 적 위인의 업적과 당시의 생활상과 환경들을 돌아보며 애 국심을 고취 시킬 수 있는 아주 좋은 장소이지요. 서울에 오시게 되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러봐야 할 필수코스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비대면 시대, 협회운영은 어떻게 하시는지요. 


기념관은 다중이용시설이다 보니 사실 휴관을 계속 이어 오고 있는데 추석 이후 예약제로 전환하여 개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엄중한 상황이다 보니 협회에서는 정부의 사회적 거리 두기 방침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차원에서 대면 사업을 줄여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6월 26일이 백범 김구 선생 71주기 서거 추모일에도 많은 분이 참석하시는 행사이기 때문에 실내에서의 추모식 대신 묘전에서 참배 만으로 대신했었지요. 


6·25전쟁 때문에 선생이 돌아가시고 한 10년은 추모식을 열지 못하긴 했었지만 11주기부터 는 한 해도 거른 적이 없었는데 매우 안타깝고 서운한 마 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추모식을 개최하지 못한다는 소 식을 전해 들은 많은 분이 묘소에 헌화라도 하시겠다고 연락을 주셔서 참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또 실제로 많은 분이 묘소를 찾아와 주셔서 이 어른이 대한민국 사람들 에게 어떤 존재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고 제 자리의 무게를 새삼 느꼈습니다. 


향후 협회에서 꼭 하고자 하는 사업이 있다면요. 


요즘 들어 느끼는 것은 국민이 백범 김구라는 이름은 알아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협회의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국민이 백범 김구 선생을 사 랑할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먼 역사 속의 인물이 아 니라 내 옆에서 나를 항상 지지하고 이끌어 주는 친근한 스승이 되도록 말입니다. 사실 그분이 어떠한 삶을 사셨 는지 왜 자신의 일생을 조국을 위해 헌신하시게 되었는 지 이해하는 국민이 많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을 다시 국민 속에 숨 쉬게 만드는 것이 협 회가 꿈꾸는 미래입니다. 또 한 가지 바람이 더 있다면 북한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과 관련이 있는 유적에 가보 고 관련 기록들을 찾아 국민과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롭게 왕래라도 하게 되는 날이 오게 된다면 백범 김구 선생이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 어떤 꿈을 꾸고 어떻 게 성장하였는지를 우리 국민이 직접 보고 경험할 수 있 는 토대를 마련하고 싶습니다. 


협회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보람이나 사명이 있다면요. 


2000년부터 협회 부회장직을 수행하였고, 올 2월에 회장 에 취임했으니 협회에 관계한 지 20년이 다 되어갑니다. 백범김구기념관 건립 얘기가 나오면서 김신 명예회장께서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던 제게 전시에 대한 이런저런 의견을 물어 오고 거기에 대한 답을 함께 찾아가면서 협 회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업이든 진행할 때 김 구 선생이라면 어떠셨을지, 혹은 선생의 이름에 누가 되 진 않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사업을 추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 국민에게 김구 선생의 가르침이 꼭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백범 김구 선생은 문화가 가장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셨 습니다. 그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본질은 그 나라의 문화 에 있다고 생각하시고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기셨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 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 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 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합니다. 한류라고 하는 이름으로 한국어로 된 노래를 전 세계 젊은이들이 함께 부르고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고, 한국 음식을 좋아 하는 시대가 왔는데 그것이 한국적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가 좋으니, 드라마가 재미있으니, 음식이 맛이 있으니 모두가 좋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젊은 청년들의 재능이 전 세계를 매료시킬 만큼 독창적이 고 뛰어나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그것 이 바로 백범 선생이 말씀하신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문 화가 아름다운 나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더욱 씁쓸한 것이 우리의 문화를 전 세계 가 공유하고 있으나 가장 가까워야 할 북한에서는 그렇 지 못하다는 것인데요. 1945년 광복 이후 남북관계가 좋 았던 적이 별로 없지만, 우리 젊은 세대에게 또 갈등과 경쟁의 남북관계를 물려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 다. 백범 선생이 분단을 막고자 하셨던 이유는 백범 선생이나 독립운동가들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신 것이지 이념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당시 소련군과 미군의 군정의 양상을 이념의 대립처럼 느끼셨고 이는 추후 전쟁으로 이어질 것 이라고 예견하셨습니다. 식민지에서 막 독립한 신생국가 에 전쟁이 일어나면 어찌 되겠나. 전쟁은 우리 민족과 국 가가 성공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멸의 길로 들어갈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에 이것만은 막고자 하셨던 것입 니다. 지금의 남북관계에 있어서 무엇이 중요한가와 우리 가 지금 바른길을 가고 있는 것인가를 고민해봐야 할 때 라고 생각합니다. 


백범 선생이 1948년 4월 평양을 다녀 오셨는데도 남북관계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을 때 여 러 우려를 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현실적이 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바른길이냐 잘 못된 길이냐가 생명’이라고 하셨던 그 말씀을 전하고 싶 습니다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백범 선생은 광복 이후 환국하셔서 청년들을 많이 만나 셨지요. 그때 선생이 이런 이야기를 청년들에게 하셨습니 다. “나의 칠십 평생을 두고 본 바에 의하면 어느 국가이 고 사회이고 또 개인이고 간에 청년 시기의 생장 가치 여 부가 성패를 결정한다. 청년이 진취적이고 발랄할 때 그 나라는 흥한다.” 선생은 항상 청년들을 소중히 알고 사랑 해 오셨습니다. 


저 또한 우리 청년들이 소중하고 또 애틋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가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데 무조건 참고 인내하라고 하기도 미안한 심정입니다. 그런데도 재기 넘 치고 발랄한 청년들의 모습이 대견합니다. 이제 대한민 국은 청년들의 몫입니다. 그저 기성세대로서 우리 젊은이 들을 믿고 응원해주는 것이 최선인 것 같습니다.


정양모 회장은 

1934년 서울출생으로 1958년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국립경 주박물관장, 한국미술사학회 회장, 국립중앙박물관장, 문화재위원회 위 원장, 경기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백범김구기념관 관장, 백범 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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