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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주 박사 - "땅에서 얻은 사랑을 전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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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WAY 김필주 박사

 

땅에서 얻은 사랑을

전 세계로

 

“북한이 개방하기만 한다면 세계에서 가장 흥분되는 짜릿한 그런 시장이 될 것이다.”

워런 버핏, 조지 소로스와 함께 세계 3대 투자가인 짐 로저스가 한 말이다. 세계 3대 투자자가 주목한 투자처로 떠오르고 있는 북한은 122,763㎢로 남한의 1.2배에 달하는 자원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곳에서 약 3000ha(900만 평) 규모의 협동농장을 경영, 지도하며 북한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 되어주었던 농학자 김필주 박사. 그는 따뜻한 어머니의 마음으로 한민족의 평화와 공존을 생각하는 인도주의자다.

글 이지영 기자  사진 손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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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백두산 천지, 사방이 눈밭이다. 7월이라고 느낄 수 없는 찬 공기가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져 온다. 어느 누구의 발자국 하나도 들여보내지 않은 전나무밭, 원시의 처녀림을 그대로 간직한 듯한 대자연의 광경에 그야말로 저절로 무릎이 꿇어진다. 압도하는 장엄함 속으로 가만히 작은 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살 수 없어 보이는 불모지처럼 보이지만 끈질기게 시간과의 투쟁을 벌이고 있는 수만, 수천의 존재들. 그곳의 눈 속에도 생명이, 꽃이 숨어 있었다. 

‘만병초’ 눈 속에서 피는 노란 진달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천국에 온 것 같은 착각에 잠시 시간과 공간을 잊고 향기에 취해 눈을 감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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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제공 석동률, 백두산천지>

 

이념을 초월한 농업생산력의 씨앗

‘만병초’라는 이름처럼 몸에 좋다는 이유로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캐가서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아름다운 추억처럼 남아있는 그 광경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반도, 아시아대륙 동북단에 위치하며 중국, 러시아, 일본과 접하는 동북아 교류의 요충지이자환태평양 진출의 거점, 남북 길이 약 1,000㎞, 동서 평균 약 300㎞의 반도와 3,200여 개의 도서로 구성된 총면적 22만2천㎢의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유일한 분단국. 여전히 체제와 이념으로 나뉜 이 땅에서 김 박사는 농장을 경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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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박사는 서울대학교에서 농학을 전공하고 당시 농촌진흥청장이던 정남규 박사의 권유로 농촌진흥청 지도국(구교도국)에서 농촌 지도를 했다. 마침 4급 공무원 합격증을 받아 놓은 상황이 었으므로 바로 발령받아 교도국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국가가 너무 가난하여 농촌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먹을 것도 씨앗 한 톨도, 비료 한 줌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산아제한’에 관한 교육이었다.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어르신들에게 산아제한 관련 교육을 한다는 것 자체도 아이러니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농촌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가을에 갔다가 봄에 다시 가면 못 만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굶어 죽었거나 가난하니까 도시로 살길을 찾아서 떠난 거죠. 초가집 대문이 바람에 헐렁거리고 창호지가 덜렁거리는 집이 점점 많아졌죠. 굶기를 밥 먹듯이 했었죠. 지도원을 한 것이 1960년부터 1962년 7월까지였는데 그때는 정말 눈물 나는 시대였었습니다.” 

이후 그는 1962년 9월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시시피주립대학에서 종자학으로 석사, 뉴욕 코넬대에서 종자생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 세계를 종횡무진 활약하던 여성농학자, 

북한 협동농장을 지도하다

미국서 학위를 마친 그는 산업현장으로 직접 뛰어들었다. 

노트럽 킹(현신젠타)에서 ‘City- Seed Testing Laboratory Manager, Seed Science Research Director’ 등의 일을 하다가 ‘파이오니어 하이브레드 인터내셔널(Pioneer Hi- Bred International, Inc)’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옥수수 육종 미국회사에 입사, 전 세계를 상대로 종자생산기술을 지원하는 일을 맡았다.  

캐나다와 미국만 빼고 전 세계에 기술보급을 하는 일이었다. 칠레부터 모스크바까지, 또 터키에서 몽골까지 8년 동안을 돌아다녔다. 

처음 임무가 서유럽 각국의 파이오니어 지부와 동업회사들의 종자 품질을 향상시키는 일이었다. 당시 동유럽에서 생산한 종자를 오스트리아에 가져다 정선하여 서유럽에서 판매하는데 종자 품질 문제로 시비가 많았다. 주로 빈에서 여장을 풀고 헝가리,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등 동유럽 국가들을 다니면서 종자 품질 테스트와 종자생산기술 지도를 할 때였는데 오스트리아가 중립국이라 빈에 북한 대사관이 있었다. 

당시 옥수수 종자 개량의 현안이 다급했던 북 대사관은 헝가리 국경에 가까이 위치한 파이오니어 오스트리아 지부에 와서 종자를 구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었던지 미국에서 통일운동을 하시던 이승만 목사님을 통해 북한을 방문하여 농업을 도와달라는 제안을 받게 됐고 남편과 북한을 방문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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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가 1988년 5월로 기억합니다. 마침 88서울올림픽이 개최되던 해라 귀국해서 물어보니 북에 다녀와도 좋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결심을 하고 나서 남편과 유서까지 쓰고 가게 된 겁니다. 직항이 없어서 중국에서 북한으로 들어가는데 북경비행장에서 비행기 문이 닫히자마자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가 나오는데 덜컥 겁이 났어요. 한 시간쯤 갔을까요. 압록강을 지나더라고요. 그때 남편과 손을 잡고 기도를 했습니다. 

이제는 정말 죽었구나 싶었죠. 그때 아이들도 아직 어렸거든요 .”  

비행장에 내리니 사방이 어두컴컴했는데 훤칠한 젊은 청년이 “김필주 선생님” 하고 찾더란다. 

잘생긴 청년이 어찌나 스스럼없이 대하는지 그전까지 무서운 것이 다 없어지면서 역시 동족이구나, 같은 민족이구나 하고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북한에서 1989년부터 1994년까지 ‘농업과학원’ 산하에 있는 ‘강냉이 연구소’와 ‘유전자원연구소’와 협력하였다. 그리고 1995년 대홍수 이후에는 북한 농업성의 요청으로 협동농장의 농업생산을 도우며 소위 고난의 행군을 같이하게 된다. 해방된 이듬해인 1946년에 김일성은 토지개혁을 실시했는데, 당시 토지개혁이란 교회나 일본인, 기타 지주들에게서 토지를 몰수해서 국민에게 1정보(3천평)씩 나눠준 것을 말한다. 

당시 몰수토지의 총량은 북한의 총 경지면적 198만 2342정보의 52%에 해당한다고 하니 얼마나 대대적인 개혁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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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개혁을 마친 북한은 대지주에게는 5정보를 상한으로 하고 일반 소작인들에게는 1정보씩 돌아가게 분배했다고 한다. 그 후 전쟁 당시 청년들이 다 전쟁터에 나가고 식량 생산이 저조해지자 김일성은 제일 먼저 평안남도 평원군에 있는 원화농장을 찾아와 노인들을 모셔놓고 협동농장 하자고 설득해서 1952년에 북한에서 처음으로 이 농장이 협동농장이 되어 기본적인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단다. 김 박사는 북한의 식량 안정 문제가 심각함을 감지하고 미국과 한국 등지에서 인도 지원을 모금하여 종자 개량 등 북한의 협동농장 생산성 향상을 위한 조언과 지원을 서슴지 않았다. 

또 1989년부터 지금까지 100 수십여 차례가 넘게 북한을 방문하였으며 11개 농장, 여 ha(약 천만 평)의 농업생산증진을 위한 지원을 하면서 선진 영농기술을 펼쳐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어 2011년 여성의 날 100주년 기념행사에 뉴스위크가 선정한 ‘세계를 움직이는 여성 150인’에 뽑히기도 했다. 

 

북한, 이모작을 시작하다

북한에서 이모작을 처음 시작하게 된 것은 1995년과 1996년 연이은 홍수피해를 겪으면서 부터다. 그를 비롯한 외부협력 단체와 FAO, IFAD 등 UN 기구의 조언을 받아들여 1996년 11월에 봄보리 이모작을 위한 종자 14,000t을 유엔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하여 요청함으로써 시작된다. 

그는 미국의 NGO Advocacy Organization인 Interaction에서 시작한 “Agricultural Workingroup for North Korea”에서 코디네이터로 선출되어 이모작을 정착시키는 데 일조를 하게 된다. 

이는 그가 그동안 미국 종자를 가지고 와서 생산성에 관련된 여러 가지 실험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에 원화농장에 갈 때는 원동기, 물바구미 구제 농약, 볼베어링, 옥수수 종자, 채소 종자, 나무 종자 등 여러 가지 것을 다 가져갔었어요. 원화농장에서 3년을 일했는데 그렇게 일하던 중 1996년 가을에 이모작을 하자고 북한에서 WFP에 종자를 구해 달라 요청했었죠.”  이미 1992년 그는 미국 본사의 대북지원프로젝트 중단 결정을 접하고 퇴사를 결심하고 미국 NGO Group인 Mercy Corp International의 설립자이며 부사장인 Els Culver를 도와 인도지원을 시작했고 북측의 요청에 따라 축산이 전공인 남편, 주영돈 사장과 함께 부부가 농업 기술지원과 농업 자재지원을 하면서 자산은 물론 미국 인도지원 단체와 교계의 도움으로 지원 물품을 조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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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남편과 사별한 후에는 Agglobe Services International, ‘지구촌 농업협력 및 식량 나누기 운동’이라는 비정부기구(NGO)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대북지원 사업에 몰입했다. 

국제정세에 영향받지 않고 인도주의적인 지원을 위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1990년대에는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한에 꼭 필요한 것은 이모작이라고 판단한 그는 90일 성숙기를 가진 봄보리 종자를 구해야 했다. 그러나 상황이 녹록지가 않았다. 인도적인 지원을 약속했던 국제기구와 정부들이 약속 날짜를 며칠 남겨놓고 국제적 정세와 분위기에 휘말려 지원을 철회하기를 반복했다.  “한번은 2월 5일이 지원 날짜인데 2월 4일에 안 된다고 연락이 왔어요. 미국 정부에서 하루 전에 지원이 불가하다고 통보가 내려온 거죠. 그래서 여기저기 뛰면서 따로 구한 것이 160t이었습니다. 그런데 농사가 정말 잘 되었어요. 다행히 유럽 쪽에서는 6,600t을 지원해왔죠. 하지만 그다음 해에도 지원 약속이 취소되어 자체적으로 978t을 구했는데 역시 그해에도 작물이 잘되었습니다. 그렇게 힘든 과정들을 겪고 나서 이모작이 정착되었죠. 그 당시 북에서 제일 잘한 일이 이모작을 정착시킨 일일 겁니다. 

 

종자학자의 소명

우리나라는 약 26만 개의 식물유전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유전자원 강국 중의 하나다. 

전 세계에서 노르웨이와 우리나라에만 종자 은행이 있다. 

세계 5위를 자랑하는 종자 보유국이지만 식량 대란이 다가올 경우의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종자학계의 시름은 깊다. 김 박사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해 온도가 달라지면서 종자들의 서생지역이 바뀌게 되고 자라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란다. 지구 온도가 1도 올라가면 식량 생산이 감소하는데 열대 및 아열대 국가들의 경우 약 10~15% 정도 감소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산화탄소의 농도를 높이면서 아무런 대안도 세우지 않는다면 2100년의 온도는 지금보다 약 3도가 더 올라가게 되는데 그러면 열대 및 아열대 식량 생산의 약 30~40%의 감소로 이어진다고 한다.

농학자로서 기후변화와 환경오염에 대한 화두는 언제나 그를 짓누르는 마음의 짐이라고 한다. 

1992년 리우환경회의를 시작으로 전 세계적으로 환경문제에 관한 연구가 한창인데 지난 11월 26일 송도에 있는 켄트(Ghent)대학에서는 ‘블루바이오경제와 블루탄소를 통한 지속 가능한 미래 창조’를 제목으로 한 글로벌 해양 심포지엄을 통해서 나름의 대안을 논의하는 자리를 가졌었다. 물론 김 박사도 포럼에 참가해서 기후변화, 탄소 중립에 대한 논제를 고찰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인구 증가, 천재적 재난, 전쟁 등을 고려하여 국가가 일정량의 식량을 확보하는 ‘식량안보’ 문제 또한 대안이 시급한 분야라고 말한다. 김 박사는 국가가 자국민이 먹을 식량의 70%는 생산을 해야 하고, 또 5년간 먹을 수 있는 쌀의 양을 비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식량안보에 대한 대안을 세워야 하고 이를 실행할만한 시스템을 갖춰야 한단다. 특히 북한에서 농업 생산성을 효율적으로 증대시켜본 경험자로서 남과 북의 협력으로 세계 농업강국이 될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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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적인 조건을 살려서 남한에서는 쌀을 생산하고 북한에서는 옥수수나 밀, 보리 같은 밭작물을 생산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축산은 북한에 주력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세포 등판, 개마고원 등 초지를 형성할 수 있는 땅이 있어서 소를 놓아먹이는데 최적의 환경이지요. 남쪽의 고도로 발달한 농업기술 및 4차 산업 혁명 기술, 스마트팜 시스템 등과 유전자원 특히 개량된 한우, 한돈 등이 북측의 수련된 노동력과 축산기지에서 만나 협력한다면 아마 세계 식량을 장악하는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것을 남북이 같이 해야 합니다. 

가장 빨리 성취해야 할 것 중 하나이며 가장 혜택을 받는 것 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남한의 기술과 북한의 노동력이 하나로 합쳐지고, 또 세계시장을 잘 알고 있는 남한과 자원이 많은 북한이 융합한다면 우리가 식량 강국이 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여전히 농자는 천하지대본

4차 산업혁명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것은 결국은 농업일 것이라고 김 박사는 힘주어 말한다. 인류가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기술의 최정점이 귀착하지 않을까 생각한단다. 

특히 4차 산업 혁명에서 중요한 것이 생명공학인데 생명공학의 시대가 다른 면으로 전개될 확률이 크다고 예상하였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무대가 생길 것이라고 봐요. 유전학적인 발전도 많이 되겠죠. 그래서 생물 다양성을 보존하고, 찾아내서 지속 가능한 개발을 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는 전 세계 생물의 2%밖에는 알지 못한다고들 해요. 그런데 20%를 안다면 얼마나 그 종류가 많을까요? 앞으로의 과학은 생명공학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에너지 생물에 대한 것들 말이죠. 좀 더 구체적으로 유전자 자체, 세포 자체에 대한 과학적인 지식이 쌓이면 새로운 식량 자원을 구하는 방법론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 과학자들이 어떤 대안을 찾아낼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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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박사는 4차 산업혁명 기술을 활용하여 기후변화에 대응해서 우리가 생물 다양성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가 중요한 포인트이고, 효소, 미생물, 곤충들과 같이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내는 대안 식량의 문제도 기술혁신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핵심 사안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스마트팜’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순환농업이 남과 북에서 활성화된다면 한반도 전체의 농업생산력이 증대되어 안전한 식량안보의 구축과 동시에 전 세계적인 식량 대란을 해결하는 대안 국가가 될 수도 있다고. 

고난의 행군 시기, 북한에서 농업생산력의 증대로 우리 민족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덜어준 한반도 농업의 어머니인 김필주 박사. 정치와 이념을 넘어서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고 배려하는 지구촌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는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인간이 만들어낸 이념과 정치적 틀이라는 것이 인간의 상생과 화합을 저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느낄 수가 있었다. 

평생을 땅과 함께 땅의 결과물로 삶을 채워온 그의 눈에는 인류에 대한 사랑의 빛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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