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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돌침대 최창환 회장 : '강남플랫폼'으로 다시 뜨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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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인터뷰  "장수돌침대 최창환 회장"


강남플랫폼으로 다시 뜨겁게!


‘별이 5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본 광고 문구다. 100만여 명의 고객과 함께 지난 30년을 걸어온 장수돌침대 최창환 회장이 이마에 별을 달고 직접 모델로 나선 광고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경제적 피해가 속출했지만 그는 이미 10년 전에 비대면 시대로의 전환을 예견하고 틈틈이 대안 마련을 해온 준비된 리더다. 이제 그는 한국의 문화를 전 세계로 알리기 위해 가수 ‘싸이’의 메가 히트곡 ‘강남스타일’에서 착안한 새로운 플랫폼사업 ‘강남 플랫폼’의 새로운 희망을 싹틔우고 있다.

글 이지영기자 사진 김성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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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다섯 개 이마에 달고 광고모델 되다

TV조선의 휴면 프로그램이자 스타들의 다큐멘터리인 〈마이웨이〉에 장수돌침대 최창환 회장의 인생사가 방영된 적이 있다.  건강한 수면 문화 창조를 위해 한국의 전통 온돌문화를 전 세계에 펼쳐낸 그의 지난 30년은 그야말로 ‘청년 정신’으로 무장된 경영자의 길이었다. 

“아내가 산후조리를 잘 못 해서 몸이 좋지 않았어요.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중동으로 떠난 터에 홀로 남은 아내는 아이를 낳고 나서야 저를 만날 수 있었어요. 둘째 아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산후조리를 못 하게 되어 관절염과 이런저런 통증을 달고 살았죠.” 장수돌침대의 출발은 현 대표이자 아내인 장순옥 대표를 위해서 만들게 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예전엔 기왓장을 달궈서 아픈 곳에 지지는 민간치유법이 있었다. 그 이야길 듣고 아내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직접 부품도 고르러 다니고 톱질도 하고 미싱사를 두고 더 나은 제품을 만들기를 반복했다. 처음엔 돌 찜질기를 만들었다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오늘의 돌침대를 만들게 되었다. 

사랑에 기반한 발명이었다. 이제는 그런 남편 사랑을 바탕으로 성장한 회사에 아내인 장순옥 대표가 직접 경영 일선에 뛰어들어 한국전통의 온돌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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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다큐멘터리라는 제목을 보고 ‘내가 벌써 스타가 되었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예인은 아니고 저는 그저 광고 스타라고 생각해요. 당시에 그런 광고가 처음이었죠. 광고로 저처럼 스타가 된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별이 5개’를 히트시킨 최 회장의 말에는 자부심이 들어가 있다. 우리나라에 홈쇼핑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들어온 시기는 1995년부터다. 3분 안에 상품을 홍보해서 판매하는 짧은 방송이었다. 

당시는 영국이나 미국 등 전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홈쇼핑 방송시간은 3분이었다. 상품의 가격도 거의 3만원에서 5만원대의 제품 위주였다. 200만원을 할인해서 550만원 하는 돌침대를 3분 안에 판매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3개월 동안 홈쇼핑에 매달려 보았지만 한 대도 팔지 못했다. 생각다 못한 그는 프로그램 피디를 찾아갔다. 직접 돌침대가 왜 필요한지 설명해내고 싶었고 자신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3분도 아깝다는 피디를 설득해서 최초로 30분이라는 시간을 얻어냈고 결국 30분 만에 100대를 팔았다. 다시 가격을 낮춰서 260만 원 대의 상품 250대를 1시간 만에 파는 신화를 기록했다. 한 시간에 7억을 판 것은 기적이었다. 그때부터 한 가지 제품을 1시간씩 판매하는 유행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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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년 전인데 영세한 중소기업이 침대 광고를 하면서 침대는 화면에 내놓지 않았다는 것이 특별했죠. 직접 CEO가 광고에 출연한 점도 신뢰를 줬다고 평가받고 있어요. 또 광고가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이마에 별을 붙이고 등장해서 별이 5개를 외쳤죠. 그게 획기적이었죠 .”  

최 회장의 이런 광고 기법은 지금도 대학교의 광고학 강의실에서 다뤄질 정도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홈쇼핑 최장수 상품으로 꼽히는 장수돌침대의 성공신화 뒤에는 이런 그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다. TV를 통해 물건을 산다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던 그 시절 정면돌파로 기적의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다시 광고하게 된다면 ‘누구는 만들어도 주는데 사서도 못 주냐’를 주요 문구로 만들어서 홍보할 생각이다. 그에게는 자타가 인정하는 타고난 감각이 살아 있다. 

 

고객입장에서생각하고돈키호테식으로추진하다 

인식을 바꾼다는 것, 문화를 바꿔낸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돌침대’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돌침대를 만들어서 침대 문화를 바꿔보겠다는 그의 의지는 상당히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다른 사업에서 발생한 수익을 돌침대에 계속 투자했다. 아내의 병을 고쳐서 검증된 돌침대를 아니 우리 전통의 온돌문화를 전 세계로 알려서 모두가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침대 문화’가 우리의 전통문화는 아니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미군들이 용산에서 쓰던 침대 스프링에 다시 천을 씌워서 침대로 만들어 시장에 내놓으며 만들어진 문화다. 굴지의 침대회사들이 처음 용산 등지에 사무실을 두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훗날 성수동 등으로 이전 해가면서 사업을 확장했지만 그렇게 시작된 침대 문화가 이제는 당연한 것처럼 우리 문화로 자리 잡았다. 

최 회장은 그 침대 문화에 최초로 온돌문화를 접목시켰다. 그런 발상의 전환은 끊임없이 고객들의 눈높이를 생각하고 색다른 대안을 찾아보는 돈키호테 정신에서 비롯된다. 한번은 미국에서 사업했다는 어느 사업가의 이야기를 듣고 박장대소를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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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강 아시죠? 놋으로 된 요강을 다 모아다가 미국에서 많이 팔았는데 우리나라 에서는 초콜릿을 넣어 먹는 통이라고 설명해서 다 팔았다고 하더라고요. ‘바로 이거구나!’라고 생각했죠. 기발한 방법은 많은데 사람들이 포인트를 못 잡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할 수 있어요.“. 

그의 아이디어는 다양한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더운 나라에서는 65세쯤 되면 완전히 할아버지 취급을 받는다. 사우디에 살아보니 기온이 45℃ 이상이 되는데 더위를 이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몸을 천으로 다 감고 생활을 하는데 몸에 손을 넣어보면 아주 시원하다. 몸이 스스로 차갑게 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몸이 냉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래서 일찍 노화가 찾아오는데 그곳에서는 잠을 잘 때 항상 에어컨을 켜놓을 수밖에 없단다. 만약에 잠을 잘 때 등만이라도 뜨끈하게 해주면 그 자체로 온열치료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더운 나라에 사는 그 사람들도 80세까지도 살 수 있게 된다며 열대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돌침대가 최고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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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지역인 북유럽도 마찬가지다. 햇빛을 봐야 건강해지는데 즉 원적외선을 쐬어야 건강해진다고 한다. 일조량이 적고 기온이 낮은 그곳에서는 몸의 체온을 유지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래서 사우나 문화 등도 생겨난 것. 물론 그들의 보온문화도 독특하지만 실제로 테스트해 보면 돌침대만큼 추운 지역에서 최적인 상품도 없다는 게 최 회장의 설명이다. 그에게는 사막에서 모래를 팔고 북극에서 냉장고를 파는 무한긍정의 도전정신이 있었고 그 정신이 오늘의 장수돌침대를 만든 셈이다.

 

어디서든 무엇이든 사람과 사회와 함께 한다

최창환 회장만큼 많은 이력을 가진 사람도 드물다. 사단법인 대한노인회 중앙회 상근부회장, 사회복지법인 자광재단 상임이사, 한국자유총연맹 경기도지부 회장, 사단법인 서울시 사회복지법인연합회 회장, 사단법인 세계평화실천운동본부 이사장, 레오나르 V빈치 종합건설 회장, 해병대전우회중앙회 부총재를 비롯해서 전국중기경영인연합회 중앙회장, 대한가구산업연합회장, CA PFA(Council of Asia Pacific Furniture Associations : 아시아태평양 가구협의회) 회장, WFC세계가구연합회 부회장, KBIZ 중소기업 중앙회 부회장, 국제라이온스협회 스페셜티 한국 대표 등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런 이력을 지닌 그의 삶 중심에는 항상 ‘사람과 함께’라는 철학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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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 중장비 임대업을 할 때였다. 당시 전국 중장비경영인 연합회 중앙회장을 하기도 했는데 ‘지입제’가 논란이 되던 시기였다. 지입제는 자동차 운송사업 면허를 가진 운송사업자와 실질적으로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는 차주 간의 계약에 대한 법 제도로 운수 회사에 개인 소유의 차량을 등록하여 거기서 일감을 받아 일한 후 보수를 받는 제도인데 비상식적인 법 조항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가 많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차주는 본인인데 운수 회사에 차를 배차시켜놓았기 때문에 나중에 운수 회사가 파산했을 때 본인의 차까지 가압류당하는 일이 생긴다.  

최 회장은 전체 중소기업인을 대변해서 지금의 법적 틀로 만드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겉으로는 투박해 보이지만 아주 섬세하면서도 한번 문제점을 진단해내면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대안을 찾아내고야 마는 기질을 지녔다. 그것이 어떤 분야에서 일하던 그를 리더로 만들었고 또 그만큼의 성과들을 만들어냈다. 

봉사활동에서도 선두를 달려온 그다. 위안부 할머니 시설인 나눔의 집, 루푸스 등 희소병 환자, 장애인 재활 시설, 자살 예방 생명의 전화 등에 정기적인 후원을 지속하고 있다. 또 여러 문화예술인과 연대하며 봉사를 위한 프로젝트도 기획 중이다. 기본적으로 신앙심을 바탕으로 해서 모든 일에 감사를 드리는 것에 일상화된 사업가 최 회장은 “기업에 있어 이윤추구는 최종적인 목표가 아닌 상생과 사회적 책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라며 사회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한국전통문화의세계화를꿈꾸다

장수돌침대는 1999년 미국 뉴욕에 장수산업 지사를 설립한 데 이어 2000년에는 중국 상하이 인근에 대지 3만3000㎡, 건평 1만9800㎡ 규모의 중국 현지 공장을 설립했다. 해외 30개국에 ‘온돌문화 & 한국명품체험센터’를 설립해 직접 제품을 체험해보고 한국의 우수한 제품들을 같이 전시하고 판매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사업계획을 실천해오고 있다. 

코로나가 발생하기 전까지 실제 중국에 개설한 체험센터의 경우 하루에 200명 이상이 몰렸다. 최 회장도 중국에서 우리 온돌문화가 이렇게 빨리 받아들여질 줄 몰랐다고 한다. 온돌문화체험은 최소한 1시간씩은 누워서 해야 하는데 그 1시간을 어떻게 활용할까 하는 고민을 하다가 이왕 한국의 것을 팔려고 했으니 우리나라의 우수한 제품들을 전시해놓고 직접 홍보하고 판매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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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 제품이든 김치 같은 식품류든 경쟁력 있는 모든 한국 제품들을 전 세계에 팔아보자고 마음을 먹게 되었어요. 남들이 전부 푹신한 침대 이야기를 할 때 딱딱한 침대 이야기를 하면서 장수돌침대를 홈쇼핑에서 최정상의 자리에 올려놓았거든요. 이번에는 남들이 전부 온라인 이야기를 할 때 오프라인 이야기를 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죠” 

BTS가 엔터테인먼트 분야로 대한민국이라는 이미지를 알렸다면 장수돌침대는 돌침대 체험공간을 통해 산업에 직접 공유 플랫폼 역할을 하겠다는 포부다. 폴란드에서 온 어느 한국어 교수가 말하기를 ‘중국은 공쯔(공자)관 일본은 사쿠라관 등 세계 어디를 가도 그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지만, 한국은 그런 공간이 없었다.’라고 했다. 그는 그 역할을 자신이 한번 해보겠다고 한다. 각 나라의 대사관과 영사관이 있는 곳 인근에 오프라인 사업장을 만들어서 한국문화와 한국의 우수한 제품들을 널리 알리겠다는 의도다. 전 세계 교민들과 교감이 되면 손쉽게 진행할 수 있다고도 말한다. 

이미 10년 전부터 비대면 사업을 예견한 그다. 오프라인이지만 온라인을 겸해야 하는 이 사업은 전 세계 어느 나라든지 직접적인 쌍방향 교류가 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이미 10여년 전 구상에 들어간 계획이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전 세계를 강타했을 때마침 러시아에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공항에서 여권에 도장을 찍는 직원이 대한민국 국적을 확인하고는 ‘강남스타일~’하고 그 춤을 추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역시 문화사업을 해야 한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을 ‘강남플랫폼’이라고 지었다.  강남플랫폼은 지역 강남을 이야기하는 ‘GANG-NAM’이 아니라 한국을 이야기 하는 ‘K ANG-NAM’이다. 플랫폼은 말 그대로 정거장이다. 무슨 제품이든 강남플랫폼을 통해서 우리의 문화의 우수성을 알릴 수 있다. 일례로 문이 4개 달린 냉장고가 처음 우리나라로 들어온 곳은 아시아선수촌이었다. 

미국은 일주일에 한 번씩 시장을 보기 때문에 문이 4개인 큰 냉장고가 필요하지만, 우리의 문화는 시장이 인근에 있어서 수시로 시장을 보는 문화라서 큰 냉장고는 호응이 없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제네럴 일렉트릭(GE) 사가 선보인 냉장고는 4개의 문 중에 어떤 문에서는 얼음이 나오는 것이 당시로서는 너무 놀라워서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 제품을 샀다. 냉장고 큰 사이즈를 사서 막상 집에 가보니 이번에는 싱크대랑 크기가 안 맞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때부터 오리표 싱크대가 활황기를 맞게 되었다. 코끼리 밥솥을 사기 시작한 것도, 휘슬러라는 상표가 독일 간호사들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도 다 현지에서 실사용하던 사람들에게 검증했던 것이 한몫했다. 그 흐름에 맞추어서 우리의 가전 가구의 유행과 산업이 변화됐다. 

삼성전자의 청소기나 LG전자의 텔레비전도 마찬가지다. 이미 입소문을 탄 제품들이기에 충분히 전 세계의 가전과 가구 산업을 바꾸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기폭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강남플랫폼도 그럴 것이라 그는 확신한다.

 

아직도불타는청춘

“우리만의 독특한 것, 고급스러운 것, 민속춤이든 그림이든 한국의 것을 찾아서 KANG-NAM 플랫폼의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죠. 그 어느 것이라도 좋습니다. 그것이 플랫폼이죠.” 

그는 우리 문화가 빠르기도 하지만 섬세하고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문화를 수출함으로써 한국의 문화 확산에 기여할 수 있다고 자부심을 내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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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IMF 시절 그는 할리우드에 가서 가상현실의 세계를 경험했다. 그런 경험을 통해 우리나라의 모든 모델 하우스에 가상현실 시스템을 구축해 볼 생각도 진작에 했다. 가상의 현실에서 이태리제 빨간 소파를 갖다 놓는다거나 다른 유명 고급브랜드를 가상으로 재구상해서 모델하우스의 다양성과 격을 높이는 수단으로 활용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자신과 같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많은 경험을 해보고 그 안에서 창조적 대안을 찾아보면서 적어도 10년은 앞서가는 법을 알고 있다는 그다. 

“한번은 YTN 방송녹화를 하는데 담당 피디에게 어떤 방송이냐고 물어보니 봄에 나가는 청년 대상의 프로그램이라 했어요. 곧장 방청객 중 청년층을 카메라 앞으로 앉히고 입고 있던 겨울옷을 봄 느낌이 나게 벗어달라며 부탁했어요. 

그리고 방송녹화를 했습니다.” 그의 감각이 이 정도이니 담당 피디가 놀라워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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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를 창의적으로 고객 맞춤형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그만의 비법이다. 거기에 일에 대한 열정, 그것이 그를 표현하는 대표 단어이다. 

‘강남플랫폼’이라는 무기를 장착하고 그는 다시 한번 도전을 꿈꾼다. 여전히 젊음을 간직한 그는 영원한 청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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