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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담장 밖 교육 2 부 : 아버지의 이름으로 한남자의 인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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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담장 밖 교육 2부


아버지이 이름으로 한남자의 인생으로

푸른나무재단 김종기 이사장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린 아들과, 그 이유를 애써 외면하려는 세상과 그런데도 태연하게 흘러버리는 시간들 속에서 아버지는 결심한다.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학교 폭력이라는 괴물의 실체를 세상에 알리겠다고.

기획 시리즈 담장 밖 교육 - 푸른나무재단 이사장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한남자의 인생으로" 

2부가 시작됩니다. 

글 윤용인 기자  사진 손철희 기자 


법이 만들어지다. 시스템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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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을 만들던 1995년에도 허가의 조건은 학교 폭력이라는 이름 대신에 청소년 폭력이란 용어를 쓰는 것이었다. <학교폭력예방재단>을 <청소년폭력예방재단>으로 이름을 바꾼 후에야 서울시는 재단 설립허가를 승인했다. 교육부가 학교 폭력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공식 인정한 것이 
2 0 0 4년이다. 
학폭법(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해이다. 대현이 죽고 10년 만이다. 
학폭법을 만들기 위해 김종기 씨와 <청예단>의 사람들은 거리에서 47만명의 서명을 받았다. 전태일의 죽음이 근로기준법 태동의 불씨가 되었다면 대현 군의 죽음은 어쩌면 학폭법의 시작점이었는지 모른다. 2011년 대구에서 중학교 2학년 권모 군이 친구들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아 
파트에서 뛰어내렸고 세상은 다시 뒤집혔으며 2012년 8월, 교육부에 정식으로 ‘학교폭력근절과'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지금 2022년, 학교 폭력은 감시되고, 관리되고, 기록되며, 예방되고, 그리고 줄어들고 있다. 그 선두에, 그리고 중간에, 그리고 후미에 김종기 이사장과 푸른나무재단이있다.

“직원들이 내 마음을 알기 때문에 정말 열심히 해줬어요. 덕분에 지금은 한국 NGO 중에서 많은 분야의 1등이 되었습니다. 투명도도 1등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죠. 모든 시스템이 전산화돼서 운영됩니다. 저는 그런 것이 우리 한국 사회를 맑게 변화시킨다고 자부하고 있어요.”

시민단체라고 하면 사람들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생각하는 것은, ‘돈과는 관련 없는 곳’, ‘후원이나 정부 지원을 받아 살림하는 가난한 곳’ 정도일 것이다. 가난하고 영세하니까 좋은 일을 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후원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공식처럼 순서도를 그린다. 
그러나 청예단은 그렇지 않았다. 삼성과 신원에서 일한 김 이사장의 경력이 NGO 경영에도 도움이 되었다. 세심한 감각과 기획 능력, 전체를 꿰뚫는 업무 능력도 이미 대기업에서 제대로 배운 것들이지만 NGO의 현실과 한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재정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목표로 했다. 좋은 이상이 실천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누구도 하라고 시키지 않았으므로, 시키지 않은 일을 제대로 하려면 돈을 벌어야 하고, 그 돈이 투명하게 관리될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김종기 이사장이 재단 초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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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예단 출범 1년 반 만에 굵직한 위탁기관 공모에 사업자로 선정되더니 이후로 청소년과 학원 관련 사업의 공개 입찰에서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갔다. 직원들은 밤을 새워 발표 자료를 준비했고 남들이 무모하다고 말하는 도전을 계속했으며 심지어 UN 가입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만들어냈다. 청소년 관련 단체가 UN에 가입해서, UN 기금을 받게 된 것은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최초였다. 어떤 정부의 지원이나 도움도 없이, 오직 학원폭력의 종식이라는 목표만으로 만들어낸 성과였다. UN 경제사회이사회 가입 이후 공익사업체로서 청예단은 더 승승장구했다. 지금은 전국 주요 도시에 12개 지부가 등재되어있다.  
재정적 독립이 재단이 추구하는 모든 사회적 사업에 우선한다는 그의 확신은 일종의 경험의 산물이었다. 
정부와 관료를 비롯해서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그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예술가도 있었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람들도 있었다. 청예단이 유명해지자 장관들이 인사 왔고 대통령도 방문했다. 재단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표여서 좋았으나 그러한 것들은 모두 일시적 번잡함이었고 그들은 뒤돌아서면 잊거나 제 잇속으로 청예단을 이용하거나 예산을 지원할 테니 시키는 것만 하라는 식이었다. 
밖에서 풍찬노숙하고 백의종군을 하더라도, 남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해야,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그는 아픔 속에서 배워나갔다. 

“교육부가 학교 폭력을 근절하려는 청예단의 사업에 동참하려 한다면 진정성과 지속성이라는 두 가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문제를 반드시 근절하겠다는 진정한 의지와 끝까지 물고 늘어지겠다는 지속성이 없다면 그냥 일회용 행사의 사진 찍기로만 우리 재단을 생각하는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국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청예단이 대신한다. 학교 폭력을 막기 위한 활동비를 국가가 지원하는 것이 옳다고 김종기 씨도 생각한다. 다만 그 금액이 청예단 전체 예산의 1/3을 넘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청예단이 정부의 관변단체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재단의 운영비 중 1/3은 정부 지원, 1/3은 후원금, 1/3은 자체 수익사업으로 충당하겠다는 것이 재단 운영의 포트폴리오다. 이른바 3등분의 원칙이다.
그러나 코로나 시국과 맞물려 김종기 이사장은 잠을 이루기가 힘들다.

“1년에 60명 직원의 운영비로 80억이 들어요. 그 돈을 마련해야 직원 급여를 주고 활동비를 주고 전문가를 양성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상담을 받는 아이들에게 돈을 내라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대형 NGO처럼 후원해달라며 광고를 할 수도 없어요. 자살 미수에 그친 아이 얼굴을 보여주며, 이 아이를 도와달라고 할 수는 없죠. 아이의 인권이 후원금보다는 더 중요한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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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예단이 왕성한 활동 속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학교 폭력도 눈에 띄게 줄었다. 2011년부터 청예단에서 자체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폭력실태조사를 보면 20%를 넘는 학교 폭력 발생률이 2018년에는 6% 대까지 줄어들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이버폭력의 방식으로 학원폭력이 변화하는 추세라며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다고 김종기 씨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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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예단의 사업들

“대한민국 사회는 폭력적이고 무질서하고 초법적이고 탈법적인 게 너무 많습니다. 어른들의 이런 문화가 그대로 아이들에게 옮겨갑니다. 아이들의 대화를 가만히 들어보면 욕이 그냥 언어입니다. 수업 때도 다들 자고 선생님들은 터치하지 않아요. 터치를 못하게 돼 있죠. 학교 현장에서 교사들이 발 벗고 교육적 책무를 다해야 하는데 교사들은 그 역할을 지금 하지 못합니다. 어렵게 공부해서 교사가 되고 나면 2 년 안에 사표를 내는 교사들이 허다합니다. 정년 이후 연금까지 보장되는 그 좋은 직업을 포기하는 이유는, 학교가 이미 교사들의 관리 범위 밖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학교 폭력에 학교와 교사가 어떻게 적극적인 대처를 할 수 있을까요? ”

김종기 이사장의 현실 진단은 우리 사회에 청예단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존재 이유기도 하다. 제도권 교육이 하지 못하는 것을 누군가는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상처받은 아이들과 가정을 치유해 주는 것입니다. 가해 학생도 마찬가지로 치유의 대상입니다. 두 번째는 세상에 학교 폭력이 생기지 않도록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시스템을 바꾸고 개선하는 것입니다.” 
 
‘학교 폭력 SOS 지원단’은 학교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이 SOS를 치면, 현장으로 달려가 실질적인 도움과 해결책을 만들어주는 학교분쟁 조정 프로그램이다. 
학교 폭력 상담 전화(1599-9128)는 학교 폭력으로 어려움을 겪는 누구나 무료로 상담을 받을 수 있다. 상담은 일반 상담은 물론 특수화해 중재 상담도 진행한다. 이외에도 학교폭력예방교육, 디지털시민교육,  사이버폭력예방교육,  국방부 장병인성교육,  대현이의 이름을 딴 장학금 사업, 가족역량캠프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연간 143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푸른나무재단의 교육과 상담, 시설 등을 이용한다. 350명의 직원들과 450명이 잘 짜인 톱니바퀴처럼 움직인다. 이 정도면 NGO의 규모가 아니다. 설립 초기 1억 원으로 시작한 것이 지금은 연 77억 규모로 성장했다. 사업을 더 큰 그릇에 담기 위해 이름도 푸른나무(BTF)로 바꿨다. 비전과 미션을 구체화했다. ‘청소년이 희망을 꿈꾸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세상’, BTF의 갈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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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큼 올 때까지 주변에서 친구들도 그만하라고 하고, 저도 너무 힘들었어요. 그동안 세상에 해놓은 것도 많고 이룬 것도 많다고 저를 설득했어요. 그런데 그게 잘 안 돼요. 내가 못 나서 아들을 그렇게 극한적으로 잃었는데 나 혼자 편하자고 그만둘 수 없잖아요. 우리가 해마다 구해주는 애들이 굉장히 많아요. SOS 전화를 걸어 나 죽으러 간다고 하는 아이, 그러면 우리는 바로 경찰과 연결해 아이를 찾아 내죠. 어떤 아이는 뛰어내려 척추가 16개 끊어졌어요. 그걸 병원과 연계해서 무료 수술을 하게 해주고 재활해서 대학까지 갈 수 있게 했어요. 그 아이는 지금 사회복지사가 되는 꿈을 꿔요. 자기도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를 하겠다고 말을 합니다. 어떤 여자애는 자살을 계속 시도하다 정신병원까지 갔어요. 우리가 그 아이를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보살폈어요. 전문대를 나와 취직을 했고, 부모님이 눈물을 흘리며 우리에게 고맙다고 말해요. 그 힘이에요. 내가 포기하지 않고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이름’에서 ‘김종기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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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미국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격사건의 주범이자 자신도 현장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가해자 엄마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가볍게 읽을 책은 아니었음에도 해외와 국내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가해자의 엄마가 무슨 자격으로 책을 내는 것인가의 비난과 별도로, 그책은 일종의 기록서이자 참회서이자 치유서로서 읽혔고 독자들은 책을 쓴 엄마 ‘수’의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김종기 이사장도 책을 썼다. 《아버지의 이름으로》라는 책이다. 책은 너무나 진솔하고 정직하 
며 세밀하게 당시의 상황과 주변과 그 이후와 지금을 정리한다. 더불어 책 안에는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낙인찍은 아버지 김종기가 어떻게 주체적 실존자 김종기로 변해 가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모든 사람들이 실명으로 등장하고 어떤 과장이나 감정의 과잉이 없어서 독서가 담백하다. 
책을 쓰는 과정이 힘들었을 것 같다는 질문에 김종기 이사장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너무 큰 사건이어서 책을 쓰겠다는 생각도 못 할 정도였어요. 책을 쓰는 것이 두려워 처음에는 구술로 시작했어요. 나중에는 직접 내가 썼어요. 탈고하고 병원에 입원했어요. 너무 탈진했던 거에요. 집사람은 책을 못 봐요. 몇 장 넘기다가 눈물범벅이 되죠. 그래도 날짜 하나까지 정확하게 기록하려고 했어요. 그런 강박감이 더 힘들게 했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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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많은 사람에게 읽혀졌다. 책의 인세는 모두 재단으로 돌아가 힘든 재단 살림에 효자 노릇을 했다. 책에는 상에 관한 이야기도 나온다. 김종기 씨는 상을 많이 받았다. 2004년 <유진상>, 
2005년 <피스메이커상>, 2010년 <국민훈장 동백장>까지. 상은 계속 이어졌다. 
2012년 <아산상> 대상, 2014년 세상의 틀을 바꾸는 사람들을 찾아 격려하고 지원하는 <아쇼카 시니어펠로우> 한국인 최초 선정, 2018년 <인촌상>, 그리고 그 정점에 2019년 61회 <막사이사이상>이 있다. 막사이사이상은 아시아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상이다. 고 장준하, 장기려, 제정구, 법륜스님, 박원순 서울 시장이 그 상을 받았다. 그만큼 전통과 명예가 있는 상이다. 시상식에서 대현이에게 용서를 받는 기분,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들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김종기 이사장은 술회했다. 지나간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고 외롭고 힘든 사투의 시간 속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자신과 아들의 약속을 지켰다는 것에 감사의 마음도 들었노라고 회고한다. 

“스피치를 하는데 5명의 수상자 중 제일 먼저 내가 했어요. 대현이가 하늘에서 웃으면서 축하해 
주는 것 같았어요. 아이의 죽음을 듣고 영안실에 달려가 넋을 놓고 있는데, 가해자들이 자기들 
끼리 싸우고 난동 부렸던 장면도 떠올랐어요. 그런 것을 보면서 대한민국은 어디 있고 경찰은 어
디 있고 학교는 어디 있는 거냐고 욕을 했어요. 나는 그때 이민을 생각했어요. 남미나 아프리카 
같은 데 가서 그냥 조용히 살다 죽고 싶었어요. 어쩌면 그때 그렇게 했다면 지금쯤 염세주의자 
나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해요. 이 일 덕분에 내가 구원받았고, 죄인으로서 떳떳해졌다는 생각을 무대에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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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었노라고, 사랑하노라고, 
그리고 존경했노라고 

자식을 앞세운 부모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어찌 말릴 수 있겠냐마는, 세상은 이들에게 좀더 조심스럽고 세심해야 한다. 남겨진 사람은 남겨진 생을 숙명처럼 살아갈 터인데, 김종기 이사장이 상을 받고, 더 많은 일을 하고, 책을 써도, 인간 김종기가 아닌 죽은 대현이의 아버지 김종기로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주보다 크다는 한 개인의 역사가 너무 쪼그라들고 작아져 버리는 것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인터뷰하든, 무엇을 하든, 그 처음이 늘 5층에서 떨어지는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시작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 역시 한 개인에게 너무 힘든 일이다. 남겨진 사람들의 인생 
을 온통 죽은 사람의 그림자 안에 가두고, 죽은 사람을 전제로 한 채 살아 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세상의 습관은, 실제 죽은 이조차 하늘에서 원치 않을 가혹한 짓일 것이다.
대현의 죽음 이후 그 죄를 씻기 위해 재단을 만들었지만, 그 재단이 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우량 NGO가 되고 학교 폭력에 대한 감시와 관리가 선진화되는 업적이 그저 감사하고 기쁜 것은, 재단의 외형적 성장이 곧 한 명의 고통스러운 아버지에서 한 명의 개인으로, 벼랑 끝에서 위태로운 가족이었으나 치유가 되는 가족으로 변해가는, 남겨진 자들의 회복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살아 있는 한 어찌 앞선 자식에게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멀쩡히 밥을 먹고, 사람들과 농담을 하는 그 순간에도, 순간순간 찾아오는 1초의 지옥이 천년이고 만년이다. 바로 그 경험을 죽을 때까지 한다. 정을 끊지 못하고 떠나보낸 사람들의 그리움과 보고 싶음은 제 창자가 다 끊어지는 고통도 느끼지 못할 만큼 처절한 것이다. 
김종기 씨는 스스로 살기 위해서 재단을 만들고 학교 폭력을 없애는 일을 하고 어느 순간 죽은 아들의 아버지 김종기가 아니라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김종기로 바뀌었다. 그는 푸른 나무 재단을 비영리 공익 법인이라는 NGO의 한계를 뛰어넘어 마치 초일류기업처럼 만들려는 목표가 있다. 죽은 뒤 남은 전 재산을 청예단에 기부할 것이라고 2012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청예단을 대현이에게 다하지 못한 사랑을 주기 위한 것, 대현이에게 바친 것이라고 생각하니 어렵지 않게 내린 결정이었다. 아내도 이해해줬고 딸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아빠의 결정을 지지했다.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아들을 만나면 무엇이라고 할 것이냐는 말에 김종기 씨는 말한다. 

“아빠가 용서가 된 것이니? 그리고 보고 싶었어. 아참, 누군가 저에게 사후세계 관련 책을 줘서 읽어봤더니 사람은 죽으면 가까운 사람들은 만난다고 적혀 있어요. 저는 대현이를 꼭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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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같은 생각을 했다. 부자는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꼭 만나야 한다. 아버지 김종기는 오래 아들 김대현을 품을 것이다. ‘보고 싶었다’는 아버지의 말에 아들은 화답할 것이다. 나의 아버지에서 세상의 아버지로 독립적 인생을 마감한 내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그리고 존경한다고. 소풍의 끝에서 그 둘은 그렇게 오래 안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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