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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영수' 로 인생 2막을 열어가는 코미디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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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영수' 로 인생 2막을 열어가는 코미디언입니다.


 “엄용수씨 아니에요? 왜 이름이….”

“네, 예전의 엄용수 맞습니다. 지금의 엄영수입니다.”

지난해부터 자주 듣는 말이다. 이름을 바꿨다. 부모님이 ‘물가에서 용이 났다’는 뜻으로 지어주셨지만 평범한 사람이 ‘용’자를 쓰면 팔자가 세다며 염려해주는 성명학자의 뜻을 받아들였다. 남은 인생이라도 편하게 살고 싶어서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름을 바꾸고 난 후 아내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지금 나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이 글은 자전적 스토리 전개의 특성을 살리고자 엄영수 님을 1인칭 화자로 내세워 구성했습니다글 박창수 기자  사진 손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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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한 행복한 추석

늘 곁에 누군가가 있던 사람은 모른다. 명절만 되면 찾아오는 혼자라는 외로움 을. 나이 들어갈수 록 찬바람 처럼 파고 드는 그 쓸쓸함을. 이번 추석은 달랐다. 혼자가 아닌 둘이었다. 행복했다. 뒤늦게 나타난 행운의 여신이 있었으니까.

좋은 일일수록 애타게 기다리면 오지 않고 어느 날 소리 없이 다가온다고 했던가. 20여 년을 싱글로 살아온 나에게 4년 전 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와 결혼을 했고 시니어 인생을 함께 걸어가기 시작했다. 결혼 당시 신혼부부로서 유난히도 ‘엄영수’라는 이름이 연예면 기사에 자 주 올라온 이유도 다 이 때문이다. 두 번의 이혼 이력을 지닌 희극인이 그것도 69세에 세 번째로 결혼했으니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게다가 토크쇼에 출연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 그녀와의 만남과 결혼 등에 대한 일들이 공개되었고 그로 인해 ‘삼혼의 아이콘’, ‘노익장 러브 헌터’라는 수식어들도 따라붙었다.

공부도 사랑도 늦을 때란 없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이 말을 신뢰하면서도 그게 자신에게 일어날 현실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다. 나 또한 사랑에 관한 한 특별한 기대도 바람도 없었다. 두 번의 이혼으로 인한 내 가슴속의 상처도 상처이지만 무엇보다도 똑같은 일을 다시는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나 자신의 다짐이 강했다. 시청자들을 우롱하거나 배신해서는 안 되는 연예인으로서의 책무가 크게 자리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대한민국방송코미디언협회 회장직을 맡으면서 협회를 이끌어 오는 일도 만만치 않은 데다 꾸준하게 불러주는 토크쇼 출연으로 방황할 여유도 없이 살아온 건 되레 감사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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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란 억지로 만 들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특별한 에피소드가 벌어진 것은 4년 전 초가을이었다. <KBS 아침마당>에 출연하고 있는데 어느 날 미국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LA에 거주하는 50대 교포 여성이었다. 남편과 사별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허탈감에 빠져있던 중 TV에서 나의 토크쇼를 보면서 힐링이 됐고 이를 계기로 예전에 내가 출연한 방송을 일일이 다 찾아보았다고 했다.  얼굴 한번 보자는 제안을 했다. 그녀가 바로 사랑스러운 아내 이경옥 씨다. 

방송 활동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사건이 발생하긴 하지만 뜻밖의 일이었다. 그녀는 솔직담백했고 미인이었다. 서로를 잡아 당기는 그 무언가에 이끌리면서 만남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몇 달 후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우리의 발길을 묶었다. 그런데도 6개월 될 무렵 처음 만났고 자가격리의 불편함을 무릅쓰고 몇 차례에 걸쳐 미국을 오가면서 사랑은 깊이를 더 했다. 그리고 LA 야외 결혼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쯤 들으면 사람들은 궁금해한다. ‘팬이라고 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건가?’. 나 또한 그녀의 전화가  놀랍기만 했다. 알고 보니 당시 방송에 함께 출연했던 패널 중 한 사람이 자신의 대학 동창이었기에 한결 수월하게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는 것. 인연이 되려고 했던가 보다.

 

오래된 기억 : 꿈 찾아 나선 소년과 청년

부모와 자식의 연은 천륜이라고 한다. 고희를 눈앞에 둔 나이지만 늘 마음속으로 감사하고 또 감사한 분은 부모님이다. 어머님 얼굴은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속에서 울컥 솟아오르는 뜨거움이 느껴진다. 자식이라면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나는 태어날 때부터 불효를 저지른 아들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어머님은 출산 시 난산이었다. 내 몸이 머리가 아니라 다리부터 먼저 나온 것. 우리 모자는 둘 다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다. 어머님은 출혈이 아주 심해 혼절하셨다고 하니 어찌 그 사연을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소년 시절 나는 또 한 차례 불효를 저질렀다. 물론 훗 날 결과가 좋았으니 다행이었지만 그 시절 한동안 부모님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갔을지 모를 일이다. 다름 아닌 열일곱 살에 감행한 가출이다. 고향이 원산으로 실향민인 부모님은 1948년 임진강을 넘어 파주로 온 후 화성시 발안으로 내려와 이곳에서 터를 잡고 5남매를 키웠다. 원산상업학교 출신으로 당시 백화점에서 근무했던 아버지는 남으로 내려오자 마땅한 직업을 찾지 못해 고물장수까지 해야 했다. 능력은 있으나 무용지물 격이었던 당신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생계와 자식들 교육을 책임진 가장은 어머니였다. 우시장에서 국밥을 팔아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가르친 강한 분이었다. 집안 형편이 이러 했으니 형은 서울로 유학을 하러 갔지만 둘째 아들인 나는 현지 농업학교를 가야 했다. 내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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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서울로 고등학교 보내주세요”라고 어머님께 조르면  “서울은 깡패가 많아서 위험하단다”라고 하셨다.  하지만 축산, 화훼, 농업은 적성도 맞지 않았거니와 땅 한평도 없는 집안이니 희망이란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친 사고가 바로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무작정 상경한 일이었다. 

사실 마음 한켠에는 내가 돈 벌어서 졸업 후 코미디언이 되겠다는 야심이 숨어 있었다. 

그 시절엔 겁도 없었다. 아는 이 한 명 없는 서울에서 신문 배달을 하고 공사판을 찾아다니며 일을 했다. 

1년 동안 학비로 쓸 돈을 모았다. 그런 후에 부모님을 찾아 가니 내 강한 의지에 허락을 해주셨다. 동생들과 함께 생활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는 장학금을 받고자 홍익대학교를 선택했다. 대학에 들어간 후 잠자고 있던 끼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장학생 자격을 유지하고자 나름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축제 때에는 사회도 보고 말재간이 남다르다는 인정을 받으며 밤무대에도 출연했다. 그러던 어느날 방송국에 입성할 기회가 찾아왔다. 

1979년 당시 동양 라디오(TBC) PD가 <노래하는 곳에>라는 프로에 출연을 시켰다. MC가 “오늘은 대학가에서 웃음을 주는 엄용수씨 나오셨습니다”라고 소개되는 순간이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코미디언으로서의 공식적인 데뷔는 1981년 ‘MBC 제1회 개그콘테스트’ 였다.

 

시사 풍자로, 성대모사로 화려했던 스타 시절 

방송계에 입문하던 시절은 뽀빠이 이상룡 선배를 비롯해 허참, 남성남, 남철, 남보원, 백남봉 등의 선배들이 스타의 자리를 굳히고 있던 때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운도 따랐던 것 같다.  

KBS2 <유머 1번지>에서 1986년 11월부터 2년에 걸쳐 인기몰이한 ‘회장님 우리 회장님’을 비롯해 ‘하룡서당’. ‘네로 25시’ 등 1980 년대 코미디를 대표할 수 있는 작품에 출연하면서 코미디언으로서의 자리매김을 확실하게 했던 시기다. 1980년대는 시사 풍자를 많이 하던 시기였다. 단지 웃

기기만 하는게 아닌 현실 참여형 코미디가 많았다. 웃으면서 시대정신을 생각하게 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성대모사가 큰 몫을 했다. 지금까지도 시청자들이 기억하는 엄영수는 ‘성대모사의 달인’이다. 외모는 누구에게나 친근감 있는 동네 아저씨 같은 이미지이면서도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김대중 대통령, 가수 조영남 등 그 시대 유명인물들의 목소리 흉내는 최고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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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성대모사를 잘하는 이들을 보고 ‘타고났다’ 고 말하곤 한다. 과연 그럴까? 그건 아니다. 사실 성대모사는 엄청난 연습이 필요하다. 단순히 목소리로만 흉내를 낸다면 메시지가 담긴 뼈 있는 풍자가 되질 않는다. 어떤 내용으로 성대모사를 할 것인지 머릿속에 대상 인물에 대한 많은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 조금 대단하게 말한다면 대상자의 머릿속을 들어갔다 나와야만 그사람의 정신과 철학을 반영시키는 완벽한 성대모사가 된다. 그 때문에 큰 인기를 얻은 만큼이나 남모르게 많은 노력과 연습을 해야만 했다. 

언젠가 조영남 씨는 “엄영수 씨가 노래도 목소리도 나보다 더 완벽하게 잘한다. 그래서 내가 그 덕을 많이 봤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성대모사는 시청자에게는 웃음과 메시지를 주고 목소리 대상자에게는 간접 홍보가 된다. 그리고 나는 인기를 얻었으니 그야말로 3자 모두에게 행복한 일을 한 셈이다. 지금도 그 시절을 기억하면 뿌듯하면서도 능력을 인정해주신 많은 분께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후배들과 함께 가는 코미디를 펼치는 시니어 인생 

시대는 바뀌었다. 코미디도 개그도 힘을 잃었다. 예능과 토크의 시대다. 이제는 가수, 탤런트는 물론이고 스포츠 선수, 요리사 등 각계 전문가로 인정받는 사람 이라면 누구든지 스타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그 만큼 코미디언이나 개그맨들이 설 무대는 좁아졌다는 얘기다. 내심 아쉬운 게 사실이지만 시청자의 요구와 시대 흐름에 발맞춰가는게 당연지사 아니겠는가? 그나마 개인적으로는 토크쇼에서 꾸준히 찾아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특히 최근에 자주 얼굴을 내민 <동치미>, <아침마당> 같은 프로그램들에 참여하면서 나이 들면서도 지속적으로 시청자들과 팬들을 만날 기회가 주어지고 있는 것에 자신감과 감사의 마음이 동시에 쌓인다.

나는 대한민국방송코미디협회 회장이다. 그간 몇 번이고 자리를 내어놓으려고 했지만, 선후배들의 강력한 지지로 인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자 사명이라 여기고 맡아왔다. 임기가 정해져 있기에 오는 2023년까지는 자리를 지켜야 한다. 협회 회장이라는 자리는 그저 감투나 명예로 끝나서는 자리는 쉬운 자리가 아니다.  850여 명의 회원 중 방송에서 활약하는 회원들은 150명은 넘지 못한다. 다 들 한때는 유명 코미디언 개그맨이었지만 인기는 영원한 게 아니기에 각자 현재 처한 상황이 제각각이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이들도 많다. 그러니 그들에게 회비 받아서 협회를 운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여전히 코미디를 좋아하고 코미디언들을 응원해주는 후원자들이 있어 그분들 후원이 조직을 이끌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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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추석 연휴 직전 폐암 투병 중인 후배 개그맨 김철민을 만나 협회를 대신해 세 번째 후원금을 전달했다. 2년째 꿋꿋이 투병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그를 보노라면 안타까움만 커진다. 하루빨리 병석에서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이다. 아마도 회원들이 나를 협회장으로 계속 남게 한 이유 또한 어려운 환경에 처한 후배들도 챙기는 등 우리 단체의 CEO로서 경영을 잘 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국의 영화, 드라마, 음악, 한복, 음식 등이 ‘K-컬처’ 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서 날개를 달고 전성시대를 만들어가고 있다. 나 엄영수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코미디언이다. 그러니 코미디언으로서는 아쉬움이 큰게 사실이다. 아직은 코미디 한류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내 소망과 할 일은 두 가지다. 인생 2막에서 만난 소중한 사람 아내와 함께 행복한 노년을 보내는 것, 그리고 하나는 우리 코미디가 한류에 합류할 수 있도록 후배들을 코미디의 세계화로 이끌어주고 밀어주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다짐한다. 건강 잘 지키면서 나를 찾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지 달려가 웃음을 선사하면서 한국 코미디의 세계화에 기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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