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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최진석 교수 -" 내 피가 나에게 속삭이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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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창  철학자 최진석 교수 

"내 피가  

나에게 속삭이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 

글 윤용인 기자  사진 PEOPLE 365 편집부  사진제공 최진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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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사단법인 새말새몸짓 이사장·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에게 붙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노장(老莊)철학 분야의 석학(碩學)’ ‘스타 철학자’ ‘ 안정된 대학교수직을 던지고 황야로 나온 실천철학가’ 등이 그를 설명하는 말들이다. 실제로 그의 삶은, 철학가가 주 는 정적인 이미지와 는 달리, 동적 궤적을 그린다. 움직임의 흔적 앞에서 세평은 분분했고 때로는 소란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고향 함평에서, <새말새몸짓 기본학교>라는 학교를 열고 제도의 교육이 아닌 재야의 교육 을 실천 중이다. 지축 을 뒤흔드는 동요가 아니더라도 동적 역동을 가진 자는 필연적으로 서사(敍事)를 품는다. 그것이 당대의 철학자라면 속내 안에 가득 무언가를 품고 있을 터. 가공 없이 동시대 철학가의 말을 듣고, 전하고 싶어 함평을 찾았다. 

작은 골목이 이어지는 평범한 시골 마을, 느닷없이 나타난 고대 그리스풍 건물이 이질감만큼의 신선함을 준다. 2020년 완 공된 이 건물은 세계건축 상 (제35회, 독일재단) 대상(大賞)에 선정되었다. 건축가 윤경식의 작품이다. ‘호접몽가(蝴蝶夢家)’라는 건물의 이름도, 벽과 기둥과 슬쩍 얹힌 듯한 지붕까지 모두, 철학적 은유와 인문의 상상이 건축과 만나 무언가를 말하고 있음을 단번에 짐작게 한다. 학교이고 강의동이고 최 교수가 기본을 실천하며 자기다움의 나비 날갯짓을 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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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이름이 기본 학교다. 왜 그렇게 지었나? 

20여 년 교육자 생활, 사회에서 수많은 강의를 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 누구든지 기본이 튼튼하면 탁월해질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기본이 뭔가?  자신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죽기 전까지 완수해야만 할 소명은 무엇인가, 인간은 끊임없이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  구체적 답이 나오지 않더라도 그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고민해 본 사람들이 탁월해진다는 것을 나는 목격했고 알게 되었다. 

어떤 커리큘럼으로 자신을 찾아가고 자기 질문을 할 수 있게 하나?  철학과 현실에 균형적 시선을 맞추려 한다. 세계와 인간과 자신에 대한 탐구는 철학적으로 접근하고 블록체인과 같은 인간이 만들어낸 최첨단의 문법들, 산업혁명, 베토벤 등 내가 딛고 있는 땅의 사건들은 현실적으로 분석하려 한다. 

실천철학가라는 세상의 호칭에 만족하시는지?  어느 기자가 지은 것 같은데 만족한다. 나는 무엇이든 실천과 실용이 따르지 않는 것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칸트, 니체, 공자,  노자의 철학이 아무리 논리적 완성도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해도 세상에 어떤 쓰임이 되는지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무의미해진다. 

철학자가 삶의 해법까지 제시해야 한다는 것인가?  솔루션까지는 아니더라도 해법을 향해서 자신을 투신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명확함을 이유로 한 가지 길만을 제시하는 것이 철학자로서 옳 은 행위인지의 자기 검열도 있을 것 같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따지는 것은 중요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너무 자세히 살필 필요는 없다고 본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내가 원하는 행위인지 아닌지를 헤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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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다는 것은 욕망을 말하는가?  그렇다. 단, 자신이 만든 욕망이어야 한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만들어진 욕망은 대개 버겁고 힘들고 철 지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자크 라캉의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와  같은  맥락인가?   대상화의 측면에서 비슷하다. 내 방식으로 말한다면, 나는 인생이 아주 짧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수행해줄 정도까지 시간은 없다.  그러니까  우선 내 피가 나한테  속삭이는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 원초적인 생명의 소리에 온 힘을 다 써 집중해야 한다. 

전제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자기 욕망을 살피는데 무엇이 꼭 전제돼야 할 필요가 있을까? 전제 혹은 사회와의 조화 등은 다 나중에 살펴도 된다. 시급한 것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는 것이고 그 이후 여유가 생기면 이것이 옳은지 아닌지, 사회와 충돌을 빚을지 아닐지 등을 따지면 된다.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또는 위대하다고 칭송받는 것들 어느 하나도 그것이 옳기 때문에 태어나거나 생겨난 것은 없다. 우선 생겨났고 그다음에 평가가 따랐다. 

대상화된 욕망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교육의 최우선으로 설정한 계기는?   오랜 강의와 강연을 통해 내가 놀랐던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거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보다 더 놀라운 점은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자기한테 물어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더 나 아가,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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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인지는 한나 아렌트의 사유적 알아차림으로도 확장되는 것 인가?  물론이다. 그녀도 악의 평범성을 말하면서, 평범한 보통 사람이 어떻게 악인이 되는가를 설명했다.  ‘사유의 고갈’, ‘생각하지 않음’이 주요한 원인이라고 했다. 내 생각도 그렇다. 의식은 저 혼자 알아서 들락날락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를 궁금해 하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발동시켜야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궁금증이 촉발되지 않은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하거나 혹은 생각에 어떤 결이 뚜렷하지 않은 것이다.   


강호에 내려와 그가 실천하고자 하는 기본은 결국 너도 아니고 우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에 대한 근원적 탐색이다. 먹고 살고 경쟁하고 뉴스에 일희일비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쩌면 이러한 것들은 뜬구름 같은 소리로 들릴지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최진석교수의 교육적 확신과 지향은 아주 선명해 보인다. 미래를 설계하려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나를 찾는 일이라는 것.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지금 무엇을 사유하는지를 끊임없이 알아 차림 하는 것.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최진석 교수는 얼마만큼 자기 욕망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일까? 그 탐색을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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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말새몸짓 홈페이지(www.nwna.or.kr)의 <책 읽고 건너가기>를 재미있게 봤다. 매달 함께 읽을 책을 선정하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선정의 이유를 설명한 교수님의 글을 보면서, 이분 참 부지런하고 힘이 넘친다고 생각했다. 그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어느 인터뷰에서 비슷한 질문을 받았을 때, 소명이 있으면 지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 같다. 물론 조금은 지치는 것을 보니 내가 나를 멋있게 만들고 싶어서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웃음) 

안 멋있게 말씀해 달라 (웃음)   나는 내가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가 비교적 분명하다. 그것이 분명해지면 살아가는 알고리즘이 자연스럽게 짜진다. 다른 사람이 중요하다고 해도 내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교수를 그만두자 많은 사람들이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큰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 그런데 나에게 그것은 큰 결정이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욕망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싶어지면, 다른 것들은 다 부수적인 것들이 된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나?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으로 완성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구체적으로 대답 하기는 쉽지 않다.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길은 개인으로 고립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고, 사회, 국가, 우주와의 연결성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완성이 공동체의 완성, 내 행복이 공동체의 행복과 연동되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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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는 대한민국, 국가인가?  세계, 우주까지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좀 더 관념적일 수 있으니 국가라고 좁혀 말 해도 좋다. 나는 줄곧 우리의 지성이라면 대한민국을 한 단계 도약시킬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주장 했다. 나의 소명은 나의 완성과 대한민국의 도약, 이 두 가지라고 말 할 수 있고 나 는 이를 위해 조금이라도 더 내 능력에 맞는 일을 하려는 마음이 강하다. 그 목표로 움직이다 보니 에너지가  넘친다는 말을 듣는 것 같다.  

시대 혹은 국가가 교수님에게 부여한 소명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없다. 국가는 나에게 법적 활동의 권리를 보장해주고, 내가 내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도록 허락한 세계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개인주의자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나를 국가주의자라고 말한다.  나 는  그 두 개가 다 나 에게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발전과 국가의 발전이 동시적이고 협력적이라고 나는 믿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소명이 지금 몇 퍼센트나 완성되었다고 보는가?   내 소명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차림 한 것이 회갑때였다. 불과 몇 년 전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완성을 말할 단계가 아닌 것 같다. 실천적인 항목들이 좀 구체화 되고 있다는 정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몇 개월 전, 인터넷 검색창에 “최진석”이라고 자판을 누르면, 철학이 아닌 정치적 이슈의 기사들이 상위를 차지했다. ‘현 정권을 비판하는 철학자’, ‘5.18에 쓴소리하는 철학자’ 등의 헤드라인이 연관검색어로 따라왔다. 사회관계망에서는 최진석 교수의 글이 각자의 방식으로 품평 되었다. 신문의 표현대로, 무엇이 노장 철학가를 시대의 독설가로 만들고 있는 것일까? 또는, 실제 그가 독설을 발화하기는 했던 것일까? 혹은 그것 역시 최진석이라는 철학자가 추구하고자 하는 개인의 자유, 혹은 그 자유를 실천하고자 하는 내면적 욕망과 맞닿아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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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와 강연 등을 통해 스토리텔링,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부분도 강조했다. 이야기는 기본 학교의 주요 주제로도 보인다.   학교에 있으면서 논 문 쓰는 재미에 푹 빠진 적이 있었다.  거의 십 년은 논문을 아주 잘 쓰는 교수였다. 논문을 통해 트레이닝을 받고, 단단해지는 느낌을 즐겼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 쓰기 싫어졌다. 교만한 소리 같지만, 이제 내가 쓸 수 있는 논문은 다 쓴 것 같다는 생각이 찾아왔다. 그리고 논문이 아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떤 차이인가?   사람들은 ‘거짓말에 관한 존재론적 탐구’와 같은 논문을 읽고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피노키오’를 읽거나 들은 사람은 거짓말을 안하려 할 수도 있다. 논문을 읽고 사람이 변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고 사람은 변할 수 있다. 논문은 공격과 방어의 속성을 갖고 촘촘할수록 잘 쓴 논문이 된다. 그러나 이야기는 일부러 구멍을 만든다. 그 여백과 허점으로 사람들은 찾아온다. 그걸 감동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논증과 논변으로 훈련받은 내가 심리적으로 어떤 벽에 부딪혔을 때, 이제는 이야기하는 삶을 살겠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몇 달 전 신문 여기저기에서 교수님의 발언을 인용한 글들이 쏟아졌다. 자신의 발언이 언론의 의도와 입맛대로 인용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 

혹 이슈를 펼치는 자신의 방식이 전략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는가? 모든 존재는 실존적 조건, 실존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나에게 그 한계는 우리가 극단적인 분열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것을 희망하며 말을 하고 글을 쓰기도 하지만, 일부는 좌절된 희망이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돌아오는 것들은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들이다.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힐 것 인가를 생각하면서 고급스럽게 글을 쓰기에는 이 토양이 너무 척박하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할 소리를 하는 것 뿐이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역사와 시간 등에 맡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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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으로 알려진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공격 등에 피곤함과 두려움을 느껴서 인터뷰를 거절하거나 언론을 미리 검열하고 선택한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내 욕망을, 내 소임을 실천함에 있어 이것저것을 다 고려하기에는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어떤 사안이 왔을때, 내 흔적을 남기라는 내 내면의 욕망에 충실할 뿐이다. 평가와 비난, 혹은 칭찬 등을 고려할 시간이 내게 없다. 

흔적을 남기는 것에 충실하다는 것을, 세상은 공명심 많은 철학자의 행동으로 오해할 여지도 있어 보인다.   거의 모든 발화는 발화자가 하고자 했던 의미대로 통용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사람들은 옳은 소리를 듣거나 새로운 소리를 듣고 싶은 욕망이 거의 없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듣고 싶어 한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지만, 타인의 욕망까지 만족시키는 것은 내 능력 범위 밖의 일이다. 

공인이고 시대의 석학이라는 호칭까지 듣는 다는 것은 영향력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청자를 의식하지 않는 발화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도 공인은 고려해야 하는것 아닌가?   여전히 그런 것보다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렇게 본다. 위로든 상처든 그런 부분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여전히 생각한다. 

시대의 석학 또는 스타 철학자 등의 수식어가 손상되지 않는가?   그런 말들 은 나 에게 사실 아무 의미가 없다.(웃음)

그건 다 너네들이 만든 것이고? (웃음)    어떤분들이 저한테 석학이라고 말해줄 때, 나는 속으로, 야 이 정도가 석학이면, 그럼 그 이 전에 석학들도 다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웃음)

내가 이 세계를 부르고 싶은 방식으로 부를 수 있는 자유가 있듯이, 사람들도 나를 자신들이 부르고 싶은 방식대로 부를 자유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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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남기는 것은 세상에 자기 이름을 더 알리고 싶은 의도가 아닌,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 단지 “ 소임에의 실천”이라고 명쾌하게 선을 긋는다. 모든 이야기 속에서 그에게 ‘욕망’과 ‘소임’은 일관적이고 확고하다. 주제를 바꿔 철학가에게 시대진단을 청한다. 한 개의 공간에 전혀 다른 인류가 살고 있다 할 정도로 대립과 분열이 심한 시대를 건너면서 철학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술자리에서는 정치나 종교 이야기하지 말자 는 말이 정설이 되는 세상이다. 광화문 이쪽과 광화문 저쪽이 같은 언어를 쓰면서 전혀 다른 세상을 보며 대립한다. 태극기와 촛불은 토론하면서 공존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 혹은 서로 피하고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 맞는지,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가?  

그게 굉장히 복합적인 것 같다. 피해 가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고 혹은 사랑하는 척하기도 하면서 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굳이 공존이냐 아니냐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지금 상황은 차라리 갈라지는 것이 나을 것도 같다. 공존에의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철학을 향해 그러했듯, 실용적 접근 방법인가?   지금 우리나라는 이 정도의 상태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진화에 관심이 많다. 진화는 더 나아지는 것이다. 토론과 대화도 학습을 통해 진화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능력과 사유 수준이 상당해야 토론과 대화가 가능하다. 자기 할 소리만 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다. 우리가 지금 대화와 토론이 가능할 정도로 단련돼 있는가를 스스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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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훈련이 안되어서 인가?   그것도 있지만, 진영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진영에 갇혀있다는 것은 생각하는 능력을 발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진영에서는 목소리 크고 더 눈에 핏발을 세우는 쪽이 승리한다. 생각하는 능력을 발휘하면 진영에서 버림받는다,  

페미니즘 논쟁도 뜨거운 이슈다. 20대들에게 남녀 대립은 기성세대들이 생각하 는 것보다 더 심각하다. 이 부분도 극복해야 할까? 내버려 두는 것이 나을까?

남녀 대립과 정치화를 따로 분리해서 볼 수 없을 것 같다. 세상에는 정치적이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지만, 견고화된 정치 행위 습관이 남녀 문제에도 개입한 것이라고 본다. 남녀 문제 스스로 정치화한 것도 있고 정치가 남녀 문제를 이용하는 것도 있다. 그래서 지금은 억지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그대로 두는 것이 오히려 더 좋다고 본다. 

세대 간의 갈등도 대화로 해결하자고 한다. 동의하시는가?   냉정히 본다면 세대 간의 대화는, 권력이 더 강한 세대가 권력이 더 약한 세대에게 자기 세대 관념을 주입시키려는 것이다. 너희는 왜 이렇게 하지 않느냐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굳이 세대 간의 대화도 불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냥 각자 자기 세대 안에서 각자 잘 살면 된다. 어떤 한 세대가 다른 세대를 그냥  편입해 버릴 가능성이 큰 대화와 설득은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 지금은 오히려 서로 모른 체하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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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잘살자는 결론이 인상적이다. “각자 잘 살면서 이루어진 전체가 강하지. 어떤 하나의 프레임으로 전체가 통일되는 방식으로는 오히려 더 분열을 겪는다”라고 힘주어 말할 때, 그의 세계관은 개별적이고 자유롭다. 국가와 자신의 발전을 일정 부분 동일시할 때와는 또 다른 색깔, 모두 최진석 교수가 가진 색채들이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무엇인가?    나는 우리 사회가 자신의 이야기를 만드는 운동을 해나가면 좋겠다. 사람들끼리 정치와 종교 이야기를 하지 말자고 하는데,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늘 정치, 종교 이야기만하는 사람들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관심과 할 말이 그것뿐이라는 것이다. 늘 자식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같은 대답을 한다. 

종교, 정치, 자식 등의 대화 를 다른 거로 채우는 운동인가?   부모가 자기 자신의 이야기 

를 찾을 때, 자식하고 부모 사이에 건강하고 필요한 거리가 생긴다. 이 거리가 생기면 자식이 숨 쉴 공간이 생기고, 숨 쉴 공간이 생기면서 자기가 점점 확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식은 더 성장할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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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의 소회를 마지막 질문으로 해야겠다.   

인류는 이미 과거 페스트를 통해 교훈을 얻었다. 페스트의 과정에서 당시의 보편적 관념이었던 신에 대한 절대 믿음에 따라 페스트에 반응한 사람들은 대부분 죽었다.  인문 적이거나 과학적인 방식으로 페스트에 반응한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인간이 등속의 진화를 하다가 가속의 진화가 필요한 시기에 전쟁과 전염병이 찾아온다. 팬데믹을 이겨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를 

전략적으로 준비한 나라가 흥할 것이다. 인문과 과학, 그리고 실용적인 과학으로 달라질 세상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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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 교수는 나비가 날아드는 마을, 호랑나비가 꿈꾸는 학교에서 스스로 주인 되는 삶을 실천하고 강의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이곳에서는 “침묵이든 흔적 남기기든 자신이 주인이 되어 실천하라”로 변주될 것 같다. 인간이라는 거대한 우주, 특히 타인에 대하여 우리는 늘 모호하다. 몇 줄의 텍스트, 몇 마디의 말을 듣고 단정하고 확정하는 강박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모호함은 모호함으로 남겨두고 우선, 이 질문에 답하라고 최진석 교수는 반복해서 묻는다. 

“당신은 당신 욕망의 주인인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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