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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로 날아온 사랑의 홀씨 -소록도 천사 마가렛(Margaret Pissark)과 마리안느(Marian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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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록도로  날아온 사랑의 홀씨

소록도 천사 

"마가렛(Margaret Pissarek)과 마리안드(Marianne)"

 

 “인류의  평화와  형제애를  위하여(Pro  pace  et fraternitate gentium)” 노벨 평화상의 메달에 새겨져 있는 글귀이다. 노벨 평화상은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평화구현과 인간애에서 찾아내자는 인류가 만들어 낸 최고 권위의 평화상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소록도에 바친 오스트리아 출신의 두 명의 간호사야말로 이 상을 받아 마땅하다는 한 신부님이 있다.  43년이란 긴 세월 동안 자원봉사자라는 이름으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와서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천시받고 버림받던 영혼을 치유했던 푸른 눈의 두 천사, 소록도의 깊은 바다를 벗 삼아 사람이 할 수 있는 사랑의 위대함을 세월로 보여준 그녀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글 이세온 기자  사진 PEOPLE 365 편집부 

사진제공 김연준신부, ㈔마리안느와 마가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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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가렛(왼쪽)과 마리안느 간호사>

 

피아골 피정의 집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푸른 숲이 펼쳐진다. 전남 구례군에 펼쳐지는 지리산 자락의 위엄, 코로나 확산세가 심상치 않아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에서 구례군 피정의 집으로 인터뷰 장소를 바꿔준 김연준 신부님의 배려로 잠시 긴장의 끈을 풀어놓고 마음껏 숲속 공기를 들이마셔 본다. 어쩌면 끝없이 펼쳐지는 숲과 끝없는 바다는 닮았을지도 모른다. 깊고 푸른 소록도의 바다를 보면서 마리안느와 마가렛 간호사도 잠시 모든 것을 맡기고 숨을 들이마셨으리라…. 

생각이 머무르는 마지막 자락에 ‘피아골 피정의 집’이라는 간판이 시야로 들어왔다.  지붕 공사가 한창이던 피정의 집은 마침 점심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반갑게 맞이하는 신부님의 얼굴이 맑다. 점심 식사가 차려졌다. 마치 친정집에 온 듯한 전라도식 반찬들은 이내 마음의 온도를 높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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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에 대해 고민을 하는 것이 밥줄인 사람

“그래도 아직은 사람에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시죠? 인간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심겨 있는현 상황에서 누구보다 인간성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이 저의 밥줄이자 사명이죠.” 인간성 회복의 대안을 찾아야 하는 것이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라고 유쾌하게 말하는 김연준 신부님은 좋은 인간성을 갖추어야 좋은 종교인이 나온다고. 그렇게 말하는 김 신부님의 해맑은 눈빛에서 진정성이 엿보인다. 

“소록도에서 9개월간 같이 살았었죠. 두 분을 보면서 ‘그래, 인간에게 이런 모습이 있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인간성에 대한 희망을 찾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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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연의 인간성을 회복하고 싶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 간호사의 이야기를 접하면 인간은 아름다운 존재라는 희망이 생긴다고 말하는 그는 사람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소명의식으로 마리안느와 마가렛 재단을 만들게 되었다. 

교를 떠나 따뜻한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본보기를 만드는 것, 갈등과 분열로 얼룩진 세상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인간애를 느끼게 하려는 것이 큰 이유였지만, 재단을 만든 또 다른 이유는 두 간호사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이었다. 이역만리 오스트리아에서 온 그녀들이 평생을 헌신적으로 보여준 사랑에 대해 그 사랑의 빚을 갚고 싶은 마음과 평생을 바쳐 봉사와 희생을 한 그녀들의 노년을 챙겨주지 못한 가슴 깊은 미안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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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느냐, 죽이느냐

천형이라 불리며 모두가 두려워하던 한센병. 우리 근현대사의 가장 아픈 상처였던 소록도의 역사는 1916년 조선 총독부가 한센병 전문병원인 자혜의원을 설립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말이 한센인 전문병원이지 한센인을 대상으로 한 강제이주지이자 격리수용소였다. 불편하고 아픈 몸으로 감당하기 힘든 노역을 견뎌내다가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기 일쑤였다. 30만 장에 달하는 가마니를 짜게 하고 벽돌을 굽게 하는 강도 높은 노역에 치료는 고사하고 그저 섬을 탈출하는 것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어 나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광복이 되고 6·25전쟁을 겪고 나서도 이들의 고통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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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 한센병은 유전적인 요인으로 인한 병이라기보다는 전염성 질병이다. 그러나 강제로 단종수술(환자의 생식 기능을 없애는 수술)을 당하고 어쩌다가 아이를 낳더라도 감염이 염려되어 부모들은 갓난 아기를 키울 수조차 없었다. 그들의 삶은 공포와 외로움으로 짓이겨졌다. 수탄장(愁嘆場)이라고 부르던 경계선 도로에서 감염되지 않은 자녀와 부모는 도로양옆으로 갈라선 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것도 한 달에 단 한 번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면회가 허용됐다. 

문둥이 병으로 알려진 이 병에 걸리면 몸이 썩어 떨어져 나가는 아픔보다 더한 마음의 아픔을 겪는다. 가족 중에 한센병에 걸린 사람은 철저히 버림을 받았다. 유전적 감염이 아닌데도 한센병 환자를 가족으로 둔 결혼적령기의 자식들은 혼삿길이 막혔다. 한 마을에서 우물을 같이 쓰지도 못했다. 

천시받고 멸시받는 사회적 풍토 속에서 차마 자식을 죽일 수는 없었기에 당시에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소록도에 데려가는 것이었다. 다른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가족 전체를 살리기 위해서 소록도에 자식을 버리고 오는 부모의 마음은 떨어져 나간 살점보다 더 처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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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완치가 된 이후에도 사망신고를 하고 들어온 소록도를 벗어나서 되돌아갈 고향은 없었다. 사회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들, 가족으로부터 버려진 그들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죽어서도 해부실에서 한번, 화장터에서 한 번, 이렇게 세 번을 죽어야 비로소 영면에 들 수 있었던 소록도의 한센인들. 희망이라는 불씨를 지펴준 푸른 눈의 천사들을 만나기 전까지 그들은 그저 별이 없는 하늘에 살고 있는 상처로 일그러진 영혼일 뿐이었다.

  

새하얀 피부에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파란 눈을 가진

이 두 간호사는 

아무도 돌보지 않고 버려졌던

소록도 한센인들의 환부를 

맨손으로 만지며 연고를 발랐고

상처에서 나는 냄새를 

직접 맡으며 치료를 했다. 

부모에게서 버려진 고통,

세상이 버린 고통으로 인해 

평생을 외로움과 고독에서

살아온 그들에겐 

그녀들의 이런 간호방식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상처를 보듬어 준 

 사랑이자 치료제 그 자체였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서로의 마음을 소유하고 싶어합니다. 사랑이라는 마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유되고 싶은 것을 본질로, 철저히 상대방의 노예가 되는 것을 절정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원래 봉사를 의미하는 ‘서비스(servus)’는 라틴어인 ‘노예(slave)’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섬기는 데에서 그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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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한센병 발병률이 높아 치료 기술이 발달했던 인도에서 한센병에 대한 실습과 연구를 마친 후 1962년 소록도에 들어왔다. 세계적인 한센인 구호단체인 다미안재단의 일원으로서 5년 계약으로 오스트리아에서 멀고 먼 가장 가난한 한국땅, 그 가운데서도 가장 소외된 곳으로 건너온 것이다.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한국인 간호사와 의사들의 자발적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광주 교구장 헨리 대주교(Harold Henny. S.C.C.)의 요청으로 소록도로 오게 된 마리안느 스퇴거와 마가렛 피사렉은 당시 20대 중후반의 꽃다운 나이였다. 새하얀 피부에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파란눈을 가진 이 두 간호사는 아무도 돌보지 않고 버려졌던 소록도 한센인들의 환부를 맨손으로 만지며 연고를 발랐고 상처에서 나는 냄새를 직접 맡으며 치료를 했다. 부모에게서 버려진 고통, 세상이 버린 고통으로 인해 평생을 외로움과 고독에서 살아온 그들에겐 그녀들의 이런 간호방식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상처를 보듬어 준 사랑이자 치료제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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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한국은 1인당 GNP(국민 총생산)가 87달러에 불과해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국가군에 속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그들에게 월급이나 기타 복지를 제공할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다. 

1966년 다미안재단의 의료지원팀은 계약 종료에 따라 의료장비들을 소록도 병원에 기증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환자들이 또다시 방치될 것을 염려해 떠나지 않고 자원봉사자 신분으로 소록도에 남기로 했다. 그들은 환자들을 간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부인회를 통해서 소록도에 필요한 여러 가지 지원 물품과 지원금을 모금해서 소록도에 결핵센터, 정신병원, 시각장애인 시설, 영아원(한센인 자녀) 등의 시설을 짓고 공중 목욕 시설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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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는 환자의 자립을 돕기 위해 농경지를 매입해 나눠주기도 하고, 자립지원금을 지원해 주기도 하는 등 사실상 그들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 유럽에서 좋은 약을 공수하는 것은 물론, 그 약들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영양섭취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던 그들은 아침마다 전지분유를 끓여서 주전자를 들고 환자들에게 우유 한 잔씩을 먹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전염될까 두려워 항상 마스크를 끼던 한국인 의사와 간호사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마스크를 끼지도 않았고 심지어 식사도 함께했다. 또 환자들의 생일날에는 어김없이 관사로 초대해 케이크를 만들어 생일파티를 해줬다. 자신도 정상인들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잊고 있었던 한센인들에게 그런 대접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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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8회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기장 한국수장사 마리안느>


두 간호사는 그들을 섬기는 것 그 자체로 만족을 느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쏟아부었을 때 만족감을 느끼는 것처럼 상처와 한으로 얼룩진 그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완전히 희생하며 행복을 느꼈다. “스스로가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방의 완벽한 소유, 혹은 노예가 되었음으로 기쁨을 누리는 것, 그것이 사랑의 특징이거든요. 두 간호사는 그렇게 사랑을 실천한 분들이죠.”

 

 

그녀들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확연하게 

다른 부분이 있었다고 말하는 김연준 신부. 

그것은 바로 대상을 가리지 않는

사랑 이었다.

목적을 가지고 상대방을 이용하려는 

사람들 혹은 자신의 이익부터 

계산하는 사람들을 보면

누구나 심리적인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사회적으로 외면받는 사람이든

자신들을 이용하려는 사람이든

지탄의 대상이든 누구든지 똑같이 대했다.

 

수녀는 아니었지만 수녀나 다름없는 분들

40여 년의 세월 속에서 아리따운 간호사들은 할머니가 되었다. 누구누구 씨라고 부르기엔 너무 아름다웠고 존경의 대상이었던 그들은 수녀님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 당시 소록도 사람들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극진하고 성스러운 존칭이 수녀였다. 푸른 눈을 한 천사 같은 그녀들이 그곳 사람들에게 수녀로 불린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수녀 신분은 아니었지만, 평신도 재속회(세속에서 각자 고유한 직업이나 직분을 가진 상태에서 수도자의 3대 덕목인 정결, 청빈, 순명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단체)인 그리스도왕시녀회(Handmaids of christ the king) 소속이었던 그녀들은 독신서원을 하고 기도와 감사로 소록도에서의 생활을 일궈냈다. 그녀들이 머물던 관사에는 방과 방 사이에 기도실이 있어서 매일의 일과를 기도로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수녀’라는 호칭이 잃어버리게 한 것들이 있다. 바로 그녀들의 노후에 관한 대비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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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등 각국에서 지원금을 모금하여 심지어 공보의(병역의무 대신 3년 동안 농어촌 등 보건의료 취약지구에서 공중보건업무에 종사하는 의사)들의 월급까지도 지원해 주던 그녀들의 행정적 신분은 자원봉사자였다. 행정조직에서는 자원봉사자에게는 월급이 지급되지 않는다. 

행정적인 기록도 연금도 당연히 없다. 자신들이 가진 것 이상의 모든 것을 소록도에 바친 그녀들이었지만 정작 청춘을 소록도에서 바치고 난 후 노년이 되어서는 43년간의 봉사와 열정을 인정받고 기댈 수 있는 곳이 전혀 없었다. 수녀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수녀회나 다른 연관조직에서 노후를 챙기고 있을 것이라고만 막연히 생각했었다고 한다. 마리안느의 나이 69세가 됐을 때 대장암 판정을 받게 됐다. 소록도 병원은 한센인 치료기관이기 때문에 섬 밖에 있는 병원으로 4시간을 왕복해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2년여 기간 동안 치료를 받았으나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외국인이었던 그녀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국은 비약적인 발전을 했고 의료기술, 사회복지 체계 등 여러 가지 여건들이 나아져 자연히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활동영역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은 더 나이가 들면 소록도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생길 것을 염려해 편지 한 장 남기고 홀연히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기로 했다.

 

사랑의 빚을 갚는 법

그때는 그것이 최선인 줄 알았다. 그녀들이 떠난다는 것을 비밀로 유지하는 비밀서약을 하고 그녀들이 원하는 대로 떠나갈 수 있게 배려해주는 것, 그것이 그녀들을 위한 방법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녀들은 소록도 사람들에겐 존재 이유 그 자체였고, 그들 모두에게 어머니였기 때문에 그녀들이 떠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그녀들이 떠나고 나서 소록도 사람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이별의 아픔으로 많은 시간을 눈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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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떠나온 사람들의 고통도 만만치 않았다. 40년 이상을 대한민국에서 살았던 그녀들은 이미 한국 사람이었다. 해외에 선교사를 보낼 때도 10년 이상은 넘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종교계의 관행이라 한다. 10년을 넘기면 그 나라에 완전히 적응되기 때문이다. 이미 40년의 세월을 소록도에서 보내고 70이 넘은 나이에 부모님도 안 계신 오스트리아에서 그녀들이 무리 없이 적응하기란 상식적으로도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마리안느의 대장암은 천천히 치료가 되었지만, 마가렛은 단기 치매에 걸려서 가까운 시일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소록도에서의 기억만큼은 그녀를 미소짓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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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가렛과 마리안느 기념관> 


“어떤 대상을 사랑하게 되면 그 대상과 같아지게 되는 것 같아요. 그녀들은 한센인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버림받고 외로웠던 한센인과 같은 운명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 같습니다.” 

마지막까지 한센인과 운명을 같이 하고 있다는 김 신부님의 사제로서의 소회. 소록도에서 어렵고 힘들었던 그 적막한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게 이끌어준 사람도 다름 아닌 그녀들이었다. 

버림받은 상처가 있는 그들은 고집스러웠고 그들만의 소통 방식이 따로 있었다. 섬 자체가 주는 단절감이 있는 데다가 소통방식이 다른 상처받은 사람들과의 공존은 보좌신부였던 김 신부로서도 이겨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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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신부님은 마리안느와 마가렛을 찾아갔다. 

“신부님, 예수님은 제자들 발을 닦아드렸어요. 그것이면 되요.”  짧은 말이었지만 망치처럼 와 닿은 그 말은 신부님의 고통을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상대방의 발을 닦으려면 일단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것은 철저한 섬김이었다.  상대방의 밑으로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 다스리려고 하지 말고 섬겨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신부님의 소록도 생활은 즐거움이 넘치기 시작했고 다시 소록도로 오겠다는 약속을 하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약속대로 소록도로 돌아와서 마리안느와 마가렛 재단을 만들고, 그녀들의 삶을 담은 영화를 만들고, 노벨평화상 수상을 추진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가 꾸준히 소록도를 지원해 준 것처럼 볼리비아와 캄보디아에 교육사업과 보건의료 지원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또 국내에서는 봉사와 나눔을 통한 공익적 행복 확산 운동을 다방면으로 전개해오고 있고 앞으로는 미혼모 사업 등 생명을 지키는 사람들의 복지에 관련한 많은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바로 그녀들에게 받은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서이다. 사람이라면 감사할 것에 감사해야 한다는 김 신부. 인간다움을 회복함과 동시에 그 깊은 사랑에 감사하기 위해, 또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고국인 오스트리아 국민들에게 감사하기 위해서 열정을 불태우고 있지만, 지구상에서 인류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해서 김 신부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고 있다. 

 

삶으로 전해지는 사랑의 향기

그녀들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확연하게 다른 부분이 있었다고 김 신부는 말한다. 그것은 바로 대상을 가리지 않는 사랑이었다. 목적을 가지고 상대방을 이용하려는 사람들 혹은 자신의 이익부터 계산하는 사람들을 보면 누구나 심리적인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사회적으로 외면받는 사람이든, 자신들을 이용하려는 사람이든 지탄의 대상이든 누구든지 똑같이 대했다. 자신들을 이용한다는 것을 알아도 친절하게 대했다. 사람을 인간적인 잣대로 보지 않고 그녀들의 기도에서처럼 모든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람은 사랑을 받으면 희망을 품게 된다. 그것을 소록도에서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증명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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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삶은 인간성에 대한 희망을 우리들의 마음 안에 던지고 있다. 자신들이 소록도 사람들을 도와줬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간호 봉사만 했을 뿐이지, 별로 한 것이 없다고 말하며, 공로가 없는 자신들을 높이 평가해주는 것에 대해 오히려 감사해한다. 

평생을 가난하고 검소하게 기도 안에서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아온 그녀들의 이야기를 접하면 코로나로, 전쟁으로, 빈부의 격차로, 그밖에 우리들의 삶에서 평화를 앗아가는 모든 것들의 무거운 무게가 덜어지고 녹아 내리는 놀라운 따뜻함이 가슴 속에 자리함을 알게 된다. 이런 사랑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 그녀들처럼 우리도 그 사랑의 실천에 참여하는 것이 외롭고 힘든 세상 속에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대안이라는 것을 깨닫고 또 깨닫는다. 

인간다움을 지워버리기에는 너무나 소중하고 황홀한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모두가 아름답고 평화롭게 더불어서 살아갈 수 있길 희망하며, 인간성 회복을 위한 사랑과 나눔이 그녀들의 삶에서 우리 모두의 삶으로 전해지기를 바라본다.

 

 

* 이 글을

평생을 소록도에서 헌신하시며 사랑과 평화에 대한 메시지를 전 인류의 가슴속에 감동으로 남겨주시고 얼마 전 선종하신 故 마가렛 피사렉(Margaret Pissarek) 간호사께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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