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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왕, 유동근 -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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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한 왕, 유동근 


오랜만에 대하사극이 안방으로 돌아왔다. 2016년 3월 종영한 〈장영실〉 이후 5년 만이다.  KBS 대하사극 〈태종 이방원〉의 첫 방송은 주변의 뜨거운 관심 속에 지난달 12월 첫 방송이 됐다. 초반 시청자들의 반응도 좋다. 평균 9%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동안 대하사극을 갈망하는 시청자들의 요구가 계속되었지만, 광고 매출의 급감 등을 이유로 지상파 방송사들이 사극 제작을 주저했다.


한때 최고 시청률 60%를 찍었던 〈태조 왕건〉 등을 추억하기에는 방송국 안팎의 환경이 너무

변했다. 사람들은 지상파 대신 유튜브의 클립형 방송이나 넷플릭스와 같은 OTT 콘텐츠를 선호

했다. 〈킹덤〉, 〈오징어 게임〉, 〈지옥〉 등 세계적인 대유행을 이끌었던 한류 콘텐츠들이 

모두 넷플릭스 오리지널 브랜드의 이름으로 제작됐다. 소재는 광범위했고 표현은 자극적이었으며 전개 속도는 눈 돌릴 틈도 없이 빨랐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과일을 먹으며 브라운관 하나를 쳐다보던 풍경 대신 사람들은 제각각 자기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봤다. 

그럼에도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대하사극에 대한 갈망이 컸다. 무늬만 사극인 퓨전 사극 말고 진짜 정통사극에의 열망. 대하사극 부활의 배경에는 정통사극을 계승해야 한다는 공영방송의 책임감도 큰 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중장년 시청자만큼이나 정통사극의 복귀를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배우 유동근이다. 

2018년 KBS 연기 대상에서 김명민과 연기 대상을 공동 수상한 후 수감 소감에서 그는 대하 드라마를 살려달라고 시청자들에게 애원했다. “도와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라는 그의 호소는 진정성과 간절함이 함께 묻어있었다. 사극의 왕 역할만 6번을 한 배우, 그 덕분에 연기 대상을 4번이나 받은 사극의 레전드에게 대하사극은 애정의 측면에서 매우 특별한 존재일 것이다. 


방송의 역사 속에 이름을 올린 수많은 배우 중에서, 왕으로 간택된 배우가 과연 몇 명일까? 왕 

이라는 상징성을 단번에 표현할 수 있는 외모, 아우라, 풍채, 목소리 등을 인정받아 왕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면 그 자체만으로 배우의 필모그래피는 이미 남다른 특별함을 가지고 있는 것일 테다. 유동근은 KBS 대하 드라마 전성기를 이끈 주역이다. 〈장녹수〉(1995), 〈조광조〉(1996), 

<용의 눈물〉(1997), 〈명성황후〉(2001), 〈정도전〉(2 014) 등에 출연했고 시청자들의 전폭적 사랑을 받았다. 대하사극의 부활을 전해 들으며 유동근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지금 왕의 배우, 유동근의 마음은 어떠할까, 더불어 그는 최근 어떤 삶의 실록을 쓰고 있을까?


글 윤용인 기자 사진 김성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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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근이, 너는 

굉장히 악독한 걸 시켜도 

거기서 눈물을 빼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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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드라마 살려달라고 여기저기 참 많이도 빌고 다녔습니다.”

유동근 씨의 첫말은 예상대로 5년 만에 안방으로 찾아온 대하 드라마에 대한 반가움이었다. 기 

쁘다고 했다. 다행이라고 했다. 그렇게 말할 때도 그는 왕 같았다. 스마트 캐주얼 옷을 입었음에도 수염과 중저음의 굵은 음성만이 실내를 지배했다. 유동근이라는 배우의 중력을 조금은 가볍게 바꾸고자 경쾌한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윤용인 국장(이하 윤)  왕 역할을 6번 하셨습니다. 비슷하게 많이 한 분들이 최수종 씨, 김영철  씨가 있는데요. 그 배우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유동근만의 특별함이 있다 면요?

유동근 배우(이하 유)  참 말하기 어렵죠. 


  말씀해주십시오. (웃음)

  그걸 어떻게 얘기를 합니까. (잠시 후) 김영철 형님에게는 그 형님이 연기하는 왕의 모습이      있으니까 연출이 캐스팅하는 것이겠죠. 최수종 씨는 체력이 아주 좋습니다. 말도 잘 타고 

    역동적인 장면들을 아주 잘 소화합니다. 제가 저를 평가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지만, 

    <용의 눈 물>의 김재형 감독님이 이렇게 말을 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야, 너는 굉장히 

    악독 한 걸 시켜도 거기서 눈물을 빼는구나!”. 그것은 제가 배역을 해석할 때, 어떤 극한

    상황에 놓여서  악인이 된 왕이라도 인간적인 모습은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임금의 복장이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로도 꼽히고 있습니다.

<용의 눈물>은 2년 6개월, 169부작을 했습니다. 일주일에 5일은 니스를 바르고 수염을 

    붙이고 석유로 떼어 내다보니 아랫수염이 이렇게 하얘졌어요. 저를 키워준 분이 김재형 

    감독이신데, 자기 옆에 붙들어 놓고 바지저고리를 못 벗게 하고 당신 옆에서 자게 했어요. 

    도망가고 싶었는데 계속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바지저고리 한복이 제가 봐도 너무 어울

    리는 거예요.


유튜브에는 유 배우님의 명연기 명장면들이 꽤 많이 떠다니는데, 가끔 검색해서 보시면서       흐뭇해하십니까?

  아니요. 안 봐요. 전혀 안 봅니다. 저는 제가 나온 방송도 애써서 보지 않아요. 


  포털 사이트에 이름 검색해서 왕 연기는 역시 유동근이다. 

    이런 말을 찾아보려 하지도 않고요? 

그런 거 안 합니다. 성격적으로 그런 걸 못해요. 보기보다 굉장히 내성적이고 부끄러움도 

   좀 많이 타고 합니다. 또 뭔가를 티 내고 그런 것도 제가 못해요.


중저음의 보이스도 유 배우님의 특징인데, 발성 훈련이라든지 이런 걸 따로 하고 계시나요?” 

훈련을 따로 하는 것은 아니고 연극을 통해서 발성법을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 

   또 김재형 감독님에게도 훈련을 많이 받았고요. 부모님에게도 좋은 소리를 주셔서 감사

   하다고 늘 생각합니다. 젊어서 대극장에서는 마이크를 차지 않고도 객석까지 쩌렁쩌렁하게     제소리가 울리고  있다는 것을 제가 느꼈는데 이제는 그런 에너지가 안 나올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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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명사가 된 유동근만의 연기

왕의 캐릭터로 가둬두기에는 유동근의 연기가 워낙 뛰어나다는 것이 세간의 평가이다. 특히 

크게 얼굴의 표정이나 몸동작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선에서 악으로, 고요에서 분노로, 극단적 

전환을 유동근만큼 잘하는 배우는 드물다고 한다. 유동근만의 매소드 연기라고 명칭해도 좋을 하나의 영역을, 유동근 스스로 만든셈인데, 튀어 오르지 않는데 튀어 오름이 있고, 제압하지 않는데 주변의 공기까지 제압하고 있는 정중동의 연기는 유동근의 상징이 되었다.  

 

90년대 불륜 드라마로 화제가 되었던 〈애인〉에서도 그는 아슬아슬한 불안감을 은은한 미소로 대신하면서, 불륜인데 칙칙하거나 위태롭지 않은, 그런데도 매회가 낭떠러지일 수밖에 없는 불륜남의 연기를 멋지게 소화했다. 욕을해야 하는데 욕을 할 수 없는 로맨틱과 스윗함으로 인해 그 드라마는 본의 아니게 불륜을 미화한다는 국정감사의 지적까지 받았지만, 어쩌겠는가, 주인공 남자 배우의 연기 자체가 그렇게 잉크블루 컬러 셔츠인 것을 (드라마가 방영할 때 그가 입었던 잉크블루 셔츠는 불티나게 팔렸고 배 나온 김 씨 아저씨도 홀쭉이 박 부장님도 그 옷을 입고 출근하며 유동근의 흉내를 냈다. 물론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사극에서 수염을 기르고 왕의 옷을 입고 등장 했을 때 유동근은 또 전혀 다른 배우가 돼 있었다. <용의 눈물〉에서 유동근이 맡은 태종은 한국 사극 역사상 최고의 연기이자 최고의 캐릭터로 뽑힌다고 평가받는데, 〈정도전〉 37회에서 정몽주와 논쟁 중 “야 정몽주!!!”라고 내지르는 장면은 유동근이라는 배우의 힘을 느끼게 해주던 명장면으로 기록된다.

배우는 자기가 맡은 배역과 일체가 될 때, 가장 좋은 연기가 나온다. 하나의 큰 역할이 끝났을 때, 한동안 그 배역에서 헤어나지 못해 신열을 앓는 배우도 많다. 수많은 페르소나(Persona)를 자기화하는 것이 배우의 숙명이라면, 내 외면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뀐 후에 다시 자기로 회복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일 것인가. 그렇다면 왕 전문 배우에게, 몇 년 이상의 드라마가 다 끝나고 왕의 옷을 벗었을 때의 기분은 어떠할지를 물었다. 우스갯소리로 집에서, ‘중전, 고개 들어 짐의 용안을 알현하시오’라고 하는 것일까?


“배우는 일상생활에서 늘 자기를 훈련해야 하지만 집에 들어가는 순간 빨리 그 배역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집에 들어가면 각자의 서랍장이 있습니다. 아버지로서의 서랍장, 아들로서의 서랍장, 아내로서의 서랍장. 그 실제적 역할을 생각 안 하고 드라마에 빠져 있으면 어찌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제 와이프도 유명한 연기자인데요. 여기도 스타, 저기도 스타 그러면 그 집에 사는 애들도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그 말인즉, 그는 분장 전과 분장 후를 선명하게 구별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쉬운 것인지를 재차 묻기에는 그의 대답이 너무 단호하고 명확해서 우선 다른 질문을 하기로 한다. 유동근은 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에서 차순봉역으로 연기 대상을 받았다. 시대의 아버지상을 자연스럽게 소화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그는 대상 시상식에서 자신이 부모님에게 얼마나 불효였는지를 대본을 통해 알았노라고 담담히 말했다. 배우에게 대본은 직장인의 보고서처럼 늘 익숙한 것일 텐데 그것을 보면서도 자기 삶을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배우의 감수성이 신선하게 다가왔었다.


“그 드라마는 강은경 작가의 실제 아버지 얘기였어요. <정도전> 끝날 때까지 강 작가가 기다려줬으니 고마운 드라마였죠. 그때는 제가 어머님을 모시고 살았으니까 대본 속에서 아들의 역할들이 내 젊었을 때 모습을 떠올리게 했었죠. 어머니가 병원에 계셨는데 일이 바빠 지니 일주일에 4~5번 가던 것들이 점점 줄어 드는 거예요. 병원 가면은 무조건 그냥 다리만지고 손 만지고 주무르고 했는데 자주 못가니 미안해서 못 만지겠더라고요. 엄마가 나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그런 마음이 들어서, 죄인의 입장이 되더라고요. 대본을 통해 제 젊은날을 돌아보게 되었던 것은 그런 환경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배우의 생활 자체가 어쩌면 드라마를 위한 경험과 학습의 기회인지도 모르 겠 고 요 .”


지금 그는 두 아이의 아버지다. 그의 아내 전인화 씨는 JTBC 〈아는 형님〉에 출연해서 아들이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이며 음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부부 배우가 자기 아들에 대해 이렇게 조심스럽고 소심하게 커밍아웃하는 모습을 보고 세트장의 형님들은 신기해했다. 성인이 된 자식들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를 물었다.  

혹은 아버지의 역할까지도 그에게 연기를 위한 학습의 기회로 여겨지는 것인가도 궁금했다.


“아버지 역할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 다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인이 된 아이들에게 아버지 역할은 할 것이 없다고 봅니다. 제가 이래라저래라하는 스타일도 아니고요. 사람들이 아내가 나온 방송을 보고, 당신들의 영향력이라면 아들을 좀 더 키워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냐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전혀 모르는 소리입니다. 저희 직업은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서 연출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는 그냥 뽑혀야 하는 존재들이죠. 선택하는 자들이 아니라 선택을 받는 숙명입니다. 그래서 미치는 것이죠. 아들이 그런 길을 가고자 한다면 스스로 선택받는 자로서의 운명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겨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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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을 받는자의 숙명”

선택을 받는 숙명, 그가 가지고 있는 배우의 정의이다. 유동근 씨는 자신을 백수라고도 표현했다. 그 말이 너스레로 들리지 않을 만큼 그는 배우의 속성을 직업 없는 백수의 그것과 진심으로 일치시켰다. 실제의 그에게서 드라마 속 주렁주렁 달린 왕의 치장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왕의 역할에 빠져 현실과 드라마를 혼동하는 것은 절대 없다는 그의 단호한 답변은 비슷한 질문에서도 늘 일관성이 있었다. 


“선택을 받았을 때는 행복합니다. 6개월이고 1년이고 선택받은 길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끝나면 또 기다려야 합니다. 해도 해도 끝이 없으니 이게 정말 힘든 것이죠. 사람들이 저에게 다시 태어나도 연기를 할 것이냐고 질문을 하는데, 저는 안 하겠다고 말합니다. 배우는 젊었을 때 하는 것이 힘도 있고 좋다는 것이 이유겠지만 늘 선택을 받는 자리가 힘이 들기 때문이어서 인지도 모릅니다.”


일반인도 나이를 먹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얼굴과 이미지가 하나의 상품인 배우는 일반인의 두려움 그 이상일 것이다. 배우는 늙어가면서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엄연한 국내외 무대의 현실이기도 하다. 물론 여전히 왕성한 활동과 나이 들어 더 원숙한 연기를 보이는 장년, 노년의 배우들도 더러 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더러’ 있을 뿐이다. 올해 67세가 되는 유동근 씨는 세월의 흐름 앞에서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까?


“백수인데 뭘 불안하겠어요. 일 없으면 백수인데요. 세상에 잊히면 잊힌 대로 가는 거예요. 그걸 뭘 굳이 거스르려고 합니까. 그리고 잊혔어요. 누가 유동근을 기억하고 있겠습니까? 다들 각자 바쁜 세상에요. 물론 저도 유명해지고 싶었고 유명해져도 봤는데, 그럼 된 거지요. 계속 유명해지려고 애쓰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죠.” 


시종일관 유동근 씨의 대답은, 〈용의 눈물〉속 왕이 아닌, 〈나는 자연인이다〉의 출연자처럼 어느 정도 도가 트였고 어느 정도 해탈한 모습이다. 거품도 없고 허세도 없다.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이분이 연예인이 맞나 싶다. 어디 가든 대접을 받고 주목을 받은 환경 속에서 살아왔을 텐데 어떻게 저렇게 자기 부풀림을 키우지 않았는지가 의아할 정도다. 원래 태생이 그런 것인지가 궁금해서 어려서부터 또래보다 조숙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를 묻자 그가 답했다.


“그렇지는 않았고 굉장히 긍정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저도 고문관이었어요. 방송국 들어갔는데 교육은 안 시키고 맨날 연출부에서 일했습니다. 현장에서 찍은 필름을 편집실로 가져다주는 것이 제 일이었어요. 편집 기사가 볼 때 정이 갔는지, 편집하다가 좋은 장면이 있으면 늘 저에게 보여줬어요. 그것이 저의 연기에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런 것은 필요한 연기, 저런 것은 불필요한 연기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죠. 어쩌면 저는 조숙하다기보다는 제 환경에서 제 방식으로 무언가를 배우고 알아가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2부  " 유동근의 변신, 나 아닌 다른 연기자를 위하여"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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